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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나는 '왕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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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5-31 22:12:40 수정 : 2015-05-31 22: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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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왕발’이다. 그래도 평범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최근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몇 주 전 한국기자협회 서울지역 축구대회 바로 전날 있었던 일이다. 아침부터 서울 시내 운동용품점을 뒤지며 축구화를 찾았다. 남보다 발이 큰 편이라서 종류나 기능을 따지지 않고 ‘발에 맞아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조건 하나를 가지고 쇼핑에 나섰다.

그런데 이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집 근처에 있는 축구용품점에 들러 “290㎜짜리 축구화 있어요?” 하고 물으니 돌아오는 건 “그런 건 없네요” 하는 말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285㎜ 축구화를 달라고도 해봤지만, 발뒤꿈치가 밉살맞게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어떻게든 신어보려고 아등바등하는 내게 점원은 “보통 매장에서 더 큰 사이즈는 구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포기하라’는 뜻으로 알고 가게를 나서야 했다. 다른 가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이날 쇼핑은 생각지 못한 대장정이 됐다. 용산역을 떠나 종로와 명동을 헤맸고, 그러다 떠오른 게 이태원이었다.

외국인들이 자주 찾는 지역이어서 그런지 한 축구용품점에서 들은 말은 확실히 좀 달랐다. “창고에서 한 번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암요. 기다리고 말고요.’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미 발에 맞는 축구화를 찾아다니느라 황금 같은 휴일의 낮 시간을 다 쓴 뒤였다. 그러나 활짝 웃는 내게 점원은 “290㎜는 다 떨어졌네요. 혹시 285㎜는 못 신으세요”하고 물었다. 축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행히 인근 축구용품점에서 290㎜ 축구화를 만났다. 기쁜 마음에 발만 한 번 넣어보고 가장 비싼 ‘신상 축구화’를 샀다.

하루종일 발에 맞는 축구화를 찾아다니다가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불현듯 지난해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시각장애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떠올랐다. 그는 장애인 음악가를 위한 점자 악보와 스승, 교육 과정을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그가 음대에 입학할 때 원서조차 받아주지 않는 대학이 있었고, 합격한 뒤에도 불합격 위험에 처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김승환 사회부 기자
세계일보가 기획한 ‘문화융성 시대, 장애인 예술을 말하다’ 시리즈에는 하반신이 마비됐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아시아 최고의 휠체어 댄서로 거듭난 무용가도 등장하고 양손 없는 화가도 나온다. 몸의 기능 중 3분의 1가량만 사용이 가능한 장승공예가도 “제가 처음 공예를 시작할 때 주변에서 10명이면 10명 모두 못할 거라고, 안 될 거라고 저를 말렸다”는 말을 했다.

당시 만났던 불굴의 주인공들이 내 속에서 나를 꾸짖고 있는 것 같았다. 고작 ‘왕발’ 따위로 힘들어하느냐면서. ‘왕발’의 소외감을 경험한 너는 언제 한 번 이웃의 소외를 돌아본 적이 있었느냐면서.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우리와 다른 누군가를 잊고 지낸 건 아닐까. 매일매일 우리는 누군가와 선을 그으면서 살아가지만 우리는 어떤 면에서 모두 ‘왕발’인 채 살아가고 있다. 이대로 살아간다면 우리 모두가 발에 맞는 ‘신발’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세상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김승환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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