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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 영창대군, 광해군의 정적이 된 어린 아이

입력 : 2015-04-21 10:23:57 수정 : 2015-04-21 10: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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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정'의 광해군이 영창대군에 두려움을 나타냈다.

20일 방송된 MBC 월화드라마 '화정(극본 김이영, 연출 김상호 최정규)' 3회에서 광해군(차승원 분)은 영창대군(전진서 분)에 경계심을 보였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에게 "내가 무섭냐? 나도 그렇다. 이렇게 작고 어린 네가"라며 속마음을 드러냈다.

영창대군은 광해군에게 있어 가장 큰 정적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창대군을 앞세워 자신에게 도전하는 대신들이 가장 큰 적이었던 것이다. 결국 영창대군은 8세의 나이에 증살(방에 불을 때 쪄 죽임)당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된다.

선조의 불행은 임진왜란 뿐만이 아니었다. 자식복도 없었는데 중전인 의인왕후 박씨에게는 후사가 없었고, 공빈 김씨, 인빈 김씨, 순빈 김씨, 정빈 민씨, 정빈 홍씨, 온빈 한씨를 통해 14남 11녀의 자녀를 두었다.

조선 최초의 방계 혈통 왕이라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선조는 적통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후궁 소생 차남인 광해군은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부랴부랴 세자로 임명된 광해군은 무능한 아버지와는 달리 전란을 수습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사실 선조는 자신이 총애하던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을 더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신성군이 어린 나이에 병사하자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임해군이 그냥저냥한 사람이었어도 그가 보위를 이어받았겠지만 그는 선조가 생각하기에도 부적격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역사에 다시 한번 민폐를 끼치니 아들 광해군보다도 어린 인목대비를 맞아 영창대군과 정명공주를 낳았다. 영창대군의 존재는 정통성에 도전을 받던 광해군에게 큰 위협이 된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를 제거할 수 없었다. 이유는 영창대군이 권력을 알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고, 왕실의 유일한 적통대군을 지지하던 서인 세력의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광해군을 대신해 피를 묻힌건 그의 최측근인 이이첨이었다. 이이첨은 '강변칠우'들이라 불린 서자들이 일으킨 강도 사건을 '칠서의 난'으로 비화해 영창대군과 서인세력을 압박했다.

이이첨은 '칠서의 난'을 통해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외손주인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린다고 사건을 조작했다. 이로인해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됐고, 결국 유배지에서 증살을 당한다.

뿐만아니라 이이첨은 당대 문장가이자 동문수학한 허균을 이용해 인목대비 폐위론을 주도했고, 인목대비를 폐서인시켰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는 광해군에게 도덕적인 치명상을 안긴다.

명나라에 거리를 두는 외교 정책으로 대신들의 불만을 샀던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쫓아낸 패륜아로 낙인찍히게 됐다. 결국 서인 세력이 주도하에 광해군의 동생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을 왕으로 세우고 광해군을 쫓아냈다.

광해군은 역사상 최악의 국난이었던 임진왜란을 수습한 것은 물론 명청 교체기 불안한 국제상황을 현명하게 대처한 영리한 군주였다. 하지만 정적에 대한 불안감은 '패륜아 임금'으로 몰려 쫓겨나게 됐다.

만약 영창대군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광해군이 오랫 동안 왕이 됐을까?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지 않았어도 반정 세력이 들고 일어났을까? 만약 영창대군이 왕이 됐다면 조선은 어떤 나라가 됐을까?

역사에 가정법은 무의미하다. 광해군이 펼쳤던 정책들은 당시 사대부 세력이 반발할 정책들이 많았기에 어떤 식으로든 반발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광해군은 하늘의 버림을 받은 것 같은 운명의 군주였다.

여창용 기자 ent1@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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