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첫 ‘일제 과오 사과’ 발언으로 상징되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하 당시 직함)의 일본 국빈방문(9월6∼8일)을 앞두고 한·일 양국은 사전 정지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 대통령의 국빈 방일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때가 처음이다. 외교부가 30일 공개한 외교문서는 당시 전 대통령의 방일을 둘러싼 숨막히는 양국 관계의 막전막후 상황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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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가 30일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1984년 히로히토 일왕의 광복 후 첫 식민 과오 사과 발언은 처음부터 자발적 의사가 아닌 한·일 외교당국의 교섭 결과임이 드러났다. 사진은 히로히토 일왕(앞줄 오른쪽)이 1984년 9월6일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국빈 방일한 당시 전두환 대통령(왼쪽) 환영 만찬에서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서 양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만찬사를 읽는 모습. 연합뉴스 |
외교문서에 따르면 전 대통령은 방일을 계기로 재일교포 출신 보안범 5명에 대한 특별사면과 감형을 비밀리에 지시했다. 대상자는 간첩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수형 중이던 손모(당시 55)씨를 비롯해 강모(33·무기징역), 유모(35·징역 20년), 김모(33·여·징역 20년), 진모(26·징역 7년)씨 5명이다. 재일교포 출신인 이들은 광복절 특사 형태로 무기징역으로의 감형이나 석방이 추진됐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재일교포 출신 특사 요구에 대해 내정간섭과 국내 보안범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거절했었다.
외무부(현 외교부) 장관은 1984년 8월7일 주일 한국대사에게 재일교포 보안범 문제를 언급하며 “대통령 각하의 방일 관련, 재일교포 보안사범 5명에게 특사를 한다”며 “다른 국내 보안사범에 대해서는 실시하지 않을 것이고 북한의 악용 우려를 감안해 이를 공개보도치 않기로 한다”고 지시했다.
정부는 이들에 대한 특별사면을 대일 교섭에 적극 활용했다. 국가안전기획부가 8월7일 작성한 ‘재일교포간첩특사계획’ 보고서에 따르면 “(특별사면을 계기로) 주한 일본대사관을 통해 일본 정계 등에 아국(我國·우리나라)의 특별배려를 주지, 일본 정부의 호의적 반응을 유도한다”고 기록됐다.
8월8일 주일 한국대사는 외무부 장관에게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외무상(현 아베 신조 총리의 부친)은 정부가 금번 특별조치를 취해준 데 대해 감사하다고 했으며 천황(일왕)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발언을 대통령 각하께 말씀드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고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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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가 30일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정부가 1984년 김일성의 ‘연내 퇴진설’이 제기되자 이에 대비한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은 서해갑문을 방문한 김일성(오른쪽)·김정일 부자의 모습. 연합뉴스 |
전 대통령의 방일이 가까워 오자 일왕의 과거사 관련 발언 수위가 한·일 양국의 화두가 됐다. 외교문서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이와 관련해 ‘시나선’을 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시나선은 1965년 2월 한·일 기본조약 가서명 후 발표된 공동성명에서 ‘과거 불행한 과거에 연유한 한국 국민의 반일 감정에 대한 우리 측의 설명’에 대해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일본 외무상이 “그 같은 과거 관계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며 깊이 반성한다”고 밝힌 수준을 뜻한다.
외무부 장관은 8월7일 주일 한국대사에게 보낸 서한에서 “(아베 외무상 면담 기회에) 특사 조치는 각하(전 대통령) 방일 앞두고 일본 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취해진 조치임을 설명하고 (전 대통령 일본 방문 시) 최소한 1965년 국교 정상화 (과거에 유감스럽고 깊이 반성한다는) 당시 시나 외상의 표현 이상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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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가 30일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정부가 1983년 소련에 의한 대한항공(KAL) 여객기 격추사건 이후 소련 외교관과의 접촉을 사실상 금지하는 지침을 재외공관에 내렸다가 정세 변화를 이유로 1년도 안 돼 무효화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1983년 김포공항 임시보관소에 보관 중인 대한항공 여객기 잔해들. 연합뉴스 |
전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던 장세동 경호실장의 무소불위 파워도 확인된다. ‘심기경호’로 유명한 장 실장은 외무부 차관을 면담한 자리에서 “무궁화 기본 계획안에 대해 경호실로서는 별다른 의견이 없고 대체로 잘된 것 같은데 (무궁화 계획의) ‘의의’ 부분을 이론적으로 좀 더 잘 다듬어주기 바란다”고 경호 문제와 관련없는 것을 주문했다.
또 “(한·일) 외상 회담 시에 무궁화 관련 계획 발표 문제도 이미 협의된 우리 안이 좋으며 이대로 추진하기 바란다. 이는 한·일 양국 언론의 불필요한 억측 보도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는 비선(秘線)을 통해 공식 일정 외 전 대통령과의 비공식 단독 일정과 가족적 분위기 연출을 위해 9월8일 예정된 총리 관저 오찬에 전 대통령 자제의 참석을 요청한 것도 확인됐다.
정부는 그해 5∼6월 진행된 김일성의 소련·동유럽 순방이 사실상 ‘고별 방문’ 성격이 짙다고 보고 김정일로의 조기 권력이양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정부는 또 1983년 소련에 의한 대한항공(KAL) 여객기 격추사건 이후 소련 외교관과의 접촉을 사실상 금지하는 지침을 재외공관에 내렸다가 정세 변화를 이유로 1년도 안 돼 무효화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외교부가 이날 공개한 외교문서 1597권(26만여쪽)의 원문은 외교사료관에서 열람·출력을 할 수 있으며, 외교사료관 홈페이지 등을 통해 외교문서목록 데이터베이스(DB)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김청중·염유섭 기자 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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