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위적으로 키워봐야 시장이 외면하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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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많은 미국이 핀테크를 선도하는 이유. 사진=LG경제연구원 |
특히 금융당국은 시장이 새로운 흐름에 맞게 작동되도록 자율성을 충분히 보장하고 공정성 감시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금처럼 정부가 인위적으로 핀테크 산업을 키우고자 다방면에서 노력을 기울여도 시장의 외면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김종현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19일 “해외에서는 포지티브 리스트 방식에 의한 정부 규제보다 민간에 의한 보안표준 도입과 시장 필터링 기능에 의해 자율적으로 보안을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연구위원은 “우리나라는 구체적인 보안사항을 사전에 지정하는 포지티브 리스트 방식의 규제로 규정 개선이 제때 이뤄지지 않을 경우 기술발전에 뒤처지는 문제점이 발생한다”며 “선진국들은 네거티브 방식을 도입해 민간에 상당한 자율권을 부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포지티브 리스트 방식이란 법령에 미리 허용되는 사항을 열거하고 나머지 법규에서 정하지 않은 사안은 금지하는 규제 방법을 말한다. 반면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은 법에서 나열하지 않은 모두에 대해 자유롭게 사업추진을 허가하는 제도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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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하나금융경영연구소 |
일례로 미국은 명확하게 금하지 않는 한 새로운 비즈니스가 허락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의 IT기업들과 금융기관들은 혁신적인 핀테크 산업을 이끌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민간기업이 주도해 자체적으로 ‘PCI DSS’라는 보안표준을 만들고 기준에 미달하는 기업들은 시장 진입 자체가 어려운 생태계를 갖추고 있다.
PCI DSS는 비자·마스터·아메리칸 익스프레스·JCB 등 글로벌 신용카드 회사들이 설립한 ‘PCI 보안표준 협의회’(PCI Security Standards Council)에서 만든 데이터 보안표준 인증으로, 결제정보를 처리하는 기업이 갖춰야 할 글로벌 정보보호 인증을 의미한다.
게다가 미국은 금융기관 스스로 핀테크 산업에 대한 투자 및 육성에 매우 의욕적이다.
문병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사실 우리나라가 법률의 양만 놓고 볼 때 금융규제의 양이 다른 나라보다 과도한 것은 아니다”면서 “미국은 금산분리, 일반인의 크라우드펀딩 투자 금지 등 금융질서와 투자자보호를 위해 다른 나라보다 엄격하지만 전 세계 금융산업과 핀테크를 주도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미국의 민간 상업은행인 웰스파고앤드컴퍼니(Wells Fargo & Company)는 금융서비스와 IT기술의 접목을 위한 대내외 노력을 가속화하고 있다.
웰스파고는 자체 기술연구소를 세우고 첨단 IT신생기업과의 제휴 프로그램을 통해 고객경험의 면밀한 관찰을 위한 ‘민속지학적 연구’와 미래 정보기술에 기반한 금융서비스 발굴을 위한 ‘디지털 랩’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또 유망한 IT신생기업에 5만~50만달러의 지분을 투자하고 6개월간 워크숍을 제공하는 엑셀러레이터(Accelerator·육성전문기업) 프로그램을 지난해 8월 출범하는 등 실리콘밸리 벤처기업과의 연대도 확대하고 있다.
미국 BNY멜론(뉴욕멜론은행)도 디지털 서비스 확충을 위해 실리콘밸리에 기술연구소 설립했다. 첨단 IT기업들의 금융서비스 확장에 위협을 느낀 BNY멜론은 실리콘밸리에 기술연구소를 만들고 신생기업 지원을 통한 기술개발 및 투자에 나서고 있다.
BNY멜론 기술연구소는 지난해 말까지 20명을 빅데이터 관련 사업인 ‘디지털 펄스’(Digital Pulse) 프로젝트에 투입했으며 올해에는 인력 보강을 본격화한다는 계획이다.
김종현 연구위원은 “민간부문인 선진 글로벌 은행들 역시 핀테크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국내은행들도 핀테크 산업에 대한 투자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자체 기술연구소나 첨단 IT신생기업의 인수 및 연계에 속도를 내고 있으나 국내 금융사는 이 분야에서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있다”며 “글로벌 업체들의 국내시장 진출이 개시된 상황에서 국내 금융사도 보다 적극적인 고객경험 분석, IT기업과의 기술제휴 등 다각적인 노력을 통해 디지털 금융서비스 확대를 가속화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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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핀테크 산업의 현주소와 과제. 사진=우리금융경영연구소 |
‘금산분리’ 등을 이유로 인터넷전문은행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던 금융당국이 지난달 중순 핀테크 활성화 방안의 하나로 인터넷전문은행 설치를 공론화했다.
하지만 금융당국이 인터넷전문은행 설립을 고려하겠다는 뜻을 밝힌 이후 명쾌한 정책방향은 나오지 않자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업무보고 당시 인터넷전문은행 도입을 허용하겠다는 방침을 보고했다”며 “현재 인터넷전문은행 TF(태스크포스) 활동을 통해 구체적인 안을 만들어 간다는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터넷전문은행 등에서 ‘우왕좌왕’하는 정부의 자세는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핀테크 산업 진출이 늦은 만큼 하루라도 서둘러 핀테크 육성에 나서야 하나, 정부의 명확한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서 금융권과 IT기업 등 관련업계에 혼선만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한 금융전문가는 “정부가 상세한 대책을 내놓기도 전에 허용 쪽으로 방침을 발표해 업계에 혼란이 생긴 것”이라며 “논란이 분분해 최대한 빨리 정부안을 준비해 시장의 혼선을 줄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IT업계 관계자는 “IT기업들의 인터넷전문은행 참가 여부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정부가 금산분리 완화·폐지를 통해 인터넷전문은행에 IT의 진출을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관련 법규를 개정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관계자는 이어 “도입 방향 이외에 세부사항이 나오지 않았는데 IT기업이 참여를 결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정부가 발표시점 등을 분명히 해 이 같은 혼동을 가라앉혀 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금융당국이 인터넷전문은행을 승인하겠다는 방침을 미리 정해두고 검토할 게 아니라 타당성에 따라 방향을 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당국은 인터넷전문은행 설립 허용을 전제한 검토가 아닌, 경제성 및 타당성을 따져 불허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면서 “범위를 산업까지 확대할 경우 법규 개정, 시장에 미치는 영향, 부작용 등을 다각도로 분석해 되도록이면 빨리 방향을 제시해 업계의 갈증을 해소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금융당국은 올해 상반기 안에 인터넷전문은행과 관련한 세부안을 공개할 예정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현재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고려 중에 있다”며 “업계, 학계 등에서 다양한 대안이 표출되고 있어 이를 최대한 심사숙고해 최상의 방안을 빠른 시일 내에 도출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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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하나금융경영연구소 |
미국과 함께 영국이 전 세계 핀테크 산업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규제 완화가 있었다.
영국 정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금융산업이 큰 타격을 입자, 정보통신기술(ICT)과 금융을 융합한 핀테크를 신산업으로 예측하고 다양한 지원책을 실행에 옮겼다.
영국 정부는 핀테크 분야 스타트업을 육성하기 위한 전문연구소와 창업지원기관을 운영하고, 규제 완화를 위한 규제자문서비스도 제공했다. 또 글로벌 금융그룹과 공동으로 ‘금융테크혁신연구소’를 세우고 유망한 핀테크 기업을 선정·투자하고 금융사와 제휴하도록 도왔다.
스타트업이나 IT기업이 저렴한 임대료로 금융사가 밀집한 건물에 입주할 수 있게 하고, 50개 이상의 액셀러레이터는 핀테크 기업의 초기 투자 단계부터 행정·법률자문, 외부 투자자 유치 등에서 도움을 줬다.
핀테크 스타트업 관계자는 “정부의 지원책과 더불어 시장 조성을 위한 환경 마련도 필요하다”며 “과거 당국의 보안성심의만 통과하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상기했다.
그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선 은행·카드사와 제휴가 필수적인데 애로사항이 많다”면서 “정부가 앞장서 금융사가 핀테크 스타트업들을 믿고 협업할 수 있도록 분위기와 제도를 조성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다만 국내 핀테크 산업을 위한 적극적인 지원과 규제 완화는 필수적이나,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저해하거나 금융사고가 발생할 부문에 대한 통제는 충분히 감안돼야 한다.
핀테크 기업이 유사수신 업무나 우회적인 신용창출에 깊이 관여하는 것은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해칠 공산이 크므로, 핀테크 기업의 금융시스템 안정성 저해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 설정이 필요하다.
김종현 연구위원은 “규제 이슈와는 별도로 핀테크 기업들의 불안정한 서비스로 인해 대형 사고가 발생할 경우 곧바로 소비자와 핀테크 산업의 발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까닭에, 핀테크 기업의 자체적인 기술 혁신 및 서비스 경쟁력 제고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IT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앞선 기술로 서비스를 만들어도 그동안 각종 규제와 금융업권의 냉대 속에 세상에 알리지 못한 서비스가 부지기수”라며 “규제 완화와 아울러 금융업계의 인식 변화도 우리나라 핀테크 활성화에 필수요소”라고 제안했다.
박일경 기자 ikpark@segye.com
김슬기 기자 ssg14@segye.com
박종진 기자 truth@segye.com
<세계파이낸스>세계파이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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