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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35역… 역사와 시간 씨줄날줄… 여장남자, 인생을 구술하다

입력 : 2014-12-05 06:00:00 수정 : 2014-12-05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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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
회색 무대 위 배우 한 명이 서 있다. 순진하고 의욕 넘치는 미국 작가 더그다. 한순간, 같은 배우가 독일 노인 샤로테로 변한다. 조금 간드러진 목소리에 구부정한 허리가 영낙없이 나긋나긋한 노인이다. 금세 허리를 편 배우는 무시무시한 나치 장교로 얼굴을 바꾼다. 그리고 다시 껄렁껄렁한 미국 기자 존, 거침 없는 여성동성애자가 배우의 몸을 차지한다.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사진)는 배우 한 명이 35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일인극이다. 주인공은 독일인 여장남성 샤로테다. 샤로테의 인생사를 미국 작가 더그가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일종의 구술 생애사인 셈이다. 샤로테의 생애는 공식 역사에 기록되기 힘든 성적 소수자, 경계인의 경험이다.

연극은 개인의 비공식적 역사와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기록물로 남을 일이 없는 경계인의 삶, 그가 살아온 흔적, 이 흔적 위에 내려앉은 시간의 먼지가 무대를 채운다. 더그는 샤로테를 인터뷰하며, 시간의 먼지를 걷어내고 기억의 그물로 과거를 길어올린다. 그렇게 되살아난 과거는 흐릿하고 애잔하며 정겹다. 샤로테의 시간을 따라 걸어가며 관객은 그의 삶을 재구성한다.

샤로테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독일에서 남자로 태어난 그는 여장을 고집한 채 나치즘과 공산주의 속에서 살아남았다. “가장 억압적인 시기를 하이힐을 신고” 견뎠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더그는 이런 의문에 당장 미국에서 독일로 날아간다. 더그가 만난 샤로테는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눈동자, 장난스레 비뚤어진 미소”를 띤 인물로 검정 드레스와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다.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폭력적 아버지를 둔 가족사, 나치 치하에서 죽을 뻔한 경험, 공산 정권에서 몰래 운영했던 성적 소수자를 위한 바 ‘뮬락 리체’가 샤로테의 입으로 그려진다.

샤로테라는 인물에게 친근감이 깊어지는 순간, 뜻밖의 사실이 드러난다. 그가 구동독 시절 비밀경찰에 협조했다는 서류 증거가 발견된다. 그러나 본인이 말하는 실체적 진실은 다르다. 보는 이들은 혼란에 휩싸인다. 막이 내린 후에도 우리는 샤로테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샤로테 역시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한 채,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재단당한다. 그렇게 연극은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는 일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무대는 회색 빛으로 단조롭다. 여기에 놓인 빛 바래고 고색 창연한 가구 몇 점은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을 떠올리게 한다. 조명 사용이 인상적이다. 뒷벽에 배우의 그림자가 둘셋 씩 비친다. 그림자는 수시로 바뀌는 배우의 목소리와 결합해 색다른 인물을 창조한다. 그림자 자체가 샤로테의 인생에 대한 상징물로도 쓰인다. 극의 마지막에는 샤로테의 초기 인터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2시간 전쯤 무대에서 들리던 목소리다. 관객이 샤로테를 지켜본 2시간 역시 개개인의 역사가 됐고, 그 위에 시간의 먼지가 내려앉았음이 진하게 다가온다.

배우 지현준은 10대부터 70대 노인까지 1인 35역을 소화한다. 배역이 바뀔 때마다 목소리 톤과 표정은 물론이고 몸짓까지 자유자재로 바꾸며 인물 사이를 넘나든다. 지난해 초연에서는 지현준 외에도 남명렬이 같은 배역을 맡았다. 27일까지 서울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한다. 3만원. 1544-1555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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