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표류기', '천하장사 마돈나'. 이해준 감독을 상상하는 스케치는 이미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또 다른 도전이자 한 시대의 표상을 그린 영화 '나의 독재자'. 러닝타임 내내 웃고 울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나의 독재자'는 첫 남북정상회담 당시 리허설을 위해 김일성의 대역이 존재했다는 역사적 상상력을 기미한 작품으로 대한민국 한복판, 자신을 굳게 믿는 남자와 그런 아버지로 인해 인생이 꼬여버린 아들의 이야기. 10월 30일(오늘) 개봉.

이해준 감독은 전작에서 보여줬던 독특한 소재들로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의 작품들을 꼭 한 번 쯤 봐야할 영화라고 평을 내리는 이도 많다. 하지만 "'뒤늦게' 주목받는 것 같다"는 한 마디에 이해준 감독은 "뒤늦게 알아주시는 것이 속상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오랫동안 남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영화와 그보다 적지만 오랫동안 여운을 가지는 영화가 있다고 보면 후자인 것 같습니다."라고 덤덤히 말했다.
그는 이번 영화 '나의 독재자'에서 배우와 아버지와 인생의 합을 다뤘다. 그의 전작들에 비하면 한없이 평범하지만 가장 어렵고, 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해준 감독은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배우와 아버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기회라며 한 가지의 팩트부터 시작해 자신의 경험까지 담았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어렴풋이 존재할 터. 감독의 기억 속 아버지는 어디서부터 출발했을까.
"아버지를 생각하면 손이 떠올라요. 저희 집이 제사를 많이 지내는 집안이었습니다. 제사를 지내려면 한참 자고 있는 새벽에 절 깨우셨어요. 반 강제로 새벽공기를 쐬면서 아버지 손에 붙잡혀서 가요. 그리고 그 손은 두툼했지만 찬 새벽공기 때문인지 따뜻했습니다. 물론 굉장히 엄하셨어요. 영화에서처럼 독재자같은 면이 있으셨죠. 그런데 지금은 그 때의 엄하셨던 조금은 이해해보려는 마음도 들고요.(웃음) 독재자라는 단어에 '나의'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도 이해해보려는 마음이 투영됐습니다."
세상의 많은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아들을 배우 설경구와 박해일이 기막히게 분했다. 하지만 실제 이 둘은 아버지와 아들로 호흡을 맞추기엔 나이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
"고민이 많이 됐습니다. '과연 괜찮을까'라는 걱정도 했지만 어쨌든 이 영화는 특수 분장이 제일 중요한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분장 기술을 믿었습니다. 분장 감독님이 하신 말씀 중 '최고의 분장은 연기다'라고 하셨어요. 이 영화는 분장도 훌륭했지만 결국 박해일씨의 아버지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배우 설경구의 몫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설경구와 박해일은 첫 호흡이다.
"배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단지 '아버지와 아들로 가능할까'가 큰 숙제였습니다. 그런데 확신이 든 것은 설경구 형님이 이 시나리오를 하겠다고 말씀하신 날 감사하다고 악수를 했는데 손이 엄청 크고 두툼하시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아버지 같은 손이었어요. 어릴 때 항상 성큼성큼 걸으면서 걷는 아버지의 손이요. 그 순간 '아이고, 됐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손에서 부터 시작하면 되겠다' 했죠. 실제로 영화에서 경구 형님의 손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설경구는 비밀리에 김일성 대역을 하게 되는 무명 배우 성근 역을 열연했다. 그리고 극중 성근은 배역에 미쳐 결국엔 역할에 잡아먹히고 만다. 사랑하는 아들, 가족, 가난하지만 소소했던 삶까지. 그리고 22년 후에도 여전히 망상에 사로잡혀있다.
"사람의 열정이 어디로 향해있느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의 큰 열정은 결국 아들에게 향해 있는 거고, 배우로서의 욕망과 열정은 아들 앞에서의 배우이고 싶은 거예요. 다 하나로 합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도 그렇듯이 그 열정이 어떻게 변해 가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자식을 먹여 살리는 숭고한 마음에서 일을 선택하는데 일에 잡아먹히게 되고 정작 자식과의 추억은 없어지고요. 그럼 아들은 '아빠는 왜 매일 늦게 들어와' 이러면서 원망하는 거죠."
"아버지가 변해가는 모습은 다른 것일 수도 있지만 아들 앞에 멋진 배우이고 싶은 열정이 지나치거나, 어떤 역사적 사건을 만나면서 괴물처럼 변해갈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의 독재자'는 그 과정을 다루고 있어요. 그리고 자의와 뒤섞여 돌아가지 못한 것과 돌아가지 않은 것이 엉킨 것이죠."
그리고 감독은 실제로 배우가 역에 먹히는 것을 본 적이 있냐는 물음에 한 가지 기억에 남는 TV 프로그램이 있다고 말했다.
"하루는 EBS를 보는데 배우 박신양씨가 나오셔서 강연을 하시더라고요. 그 때 하셨던 말씀이 '배우는 감정이입을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빠져나오는 거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감정이입이 되는 것만 가르쳐준다. 그래서 나도 예전에 힘든 적이 있었다. 얼마나 이입을 잘 하느냐만큼 중요한 것이 빠져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성근이 떠오르지 않으신가요?(웃음)"
'나의 독재자'에서는 극중 콘스탄틴 스타니스랍스키의 '배우수업'의 한 부분이자 예술의 원리, 메소드 연기의 중요성을 수없이 외친다. 이렇게 그 시대의 신봉서처럼 읽혀져 왔던 도서와 첫 남북정상회담의 시발점이 되는 정권, 시대, 그리고 그 속의 단면적인 가정사까지 이해준 감독의 세심함이 삼박자를 이뤘다.
11월 찬 바람이 부는 계절, '나의 독재자'를 통해 아버지의 삶과 각자의 주변을 돌아보며 관계들을 정리하는 폭 넓은 영화가 되길 바란다는 이해준 감독이 여전히 궁금했다. 그의 직업의 매력에 대해 "여전히 모르겠다"고 말하며 짓는 미소가 지금도 선하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애매하지만 흥미로워요. 감독은 영화에 대한 정권을 쥐고 있지만 동시에 마음대로 안 됩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한 욕망과 그렇지 못하는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지점이 있잖아요. 제 일이 그래요. 힘들면서도 매력적이에요. 여러 사람이 협업을 해야 되는 작업이니까요. 내가 꿈꾸고 내가 쓴 언어가 이게 어떻게 현실과 만나서 변화되는지, 항상 흥미롭습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지요."
이린 기자 ent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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