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은 우리 역사 속에서 돌고 도는 폭력과 상처의 근본적인 원인을 바라보고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한다. 따라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위안부들의 상처와 여배우의 고통을 매우 적나라하게 우리 눈앞에 펼쳐놓는다. 그들이 고통 받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어떤 심정으로 어떤 일들을 당했는지 잘 알지 못하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 관객들에게 그들의 아픔을 생생하게 느껴보도록 함으로써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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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시’는 일제의 위안부 문제와 여배우 성상납 사건에 대해 모른 척 침묵하는 우리의 양심을 드러내 보인다. |
극은 또 위안부 문제와 성상납에 있어 폭력적인 행위 그 자체가 아닌, 이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침묵’에 집중한다. 하나는 가해자의 침묵이고, 또 하나는 피해자들에게 강요된 침묵이며 다른 하나는 가해자는 아니지만 이를 지켜본 자들, 우리의 침묵이다. 극중 동주는 여배우 수연을 폭행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지켜본 목격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작가는 이러한 동주의 모습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과 여배우들의 성상납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폭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말하지 않고, 모른 척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조명하는 것이다.
“기억하고 이야기해야 치유가 돼.… 치유되지 않은 고통은 사라지지 않아. 다른 이의 고통으로 흘러 다니게 돼.”
현실에서 괴로워하던 동주는 할머니 대신 저승에 가게 되고, 거기서 옥황과 염라를 만나 자신의 삶과 할머니의 삶을 성찰한 뒤 다시 돌아온다. 저승 장면은 단순한 사후세계가 아닌, 동주 자신의 내면 세계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 내면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양심을 의미한다. 이곳에서 동주가 여배우 수연의 사건을 떠올리고, 할머니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은 현실에서 애써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비겁함을 이기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그의 양심인 것이다.
‘빨간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한 편의 시를 연상케 하는 형식을 띤다. 프롤로그와 각 장면의 막 사이에 들어가는 시와 영상, 그리고 정적 등은 극 전체를 하나의 시처럼 무대 위에 펼쳐놓는다. 또한 극중 ‘빨간꽃’은 마치 시적 은유처럼 그 이미지가 반복, 강조된다. 빨간꽃은 할머니가 첫사랑에 대해 간직한 애틋한 기억이자 동시에 피로 물든 상처를 의미하기도 하고, 여배우 수연이 꿈꾸던 화려한 미래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작품에서 빨간색은 두려움과 위험, 열정과 생명력, 그리고 아름다움 등 다양한 이미지를 담아내고 있다.
18일부터 10월 5일까지 대학로 선돌극장, 10월 9∼26일 대학로 뮤디스홀에서 관객을 맞는다. (070)8261-2117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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