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민정부 초기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결정을 이끈 이민섭(75·사진) 전 문화체육부 장관이 당시의 비화를 밝혀 눈길을 끈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원장 박광무)이 발행하는 웹진 ‘문화관광’ 최신호와의 인터뷰를 통해서다.
이 전 장관에 따르면 YS가 처음부터 옛 조선총독부를 헐 결심을 한 건 아니라고 한다. 그는 “대통령께서는 (옛 조선총독부가) 역사적으로, 디자인적으로 가치가 있는 건물이라고 하니 건물을 아주 헐지는 말고 옮기는 것을 생각해보자고 하셨다”며 “그런데 내가 옮기는 계획은 옆으로 밀쳐 두고, 허는 것으로 밀고 나갔다”고 회고했다.
사실 1990년대 중반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두고 심각한 국론분열이 일어났다. 그 건물이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어 귀중한 국보·보물 수천점을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원용 목사 등 종교·문화계 인사 5000여명이 “새 박물관을 짓기 전에 헐지 말라”는 주장을 폈다. 이들은 “건축학적 가치를 감안할 때 문화재 유산으로 남기는 게 옳다”는 근거도 들었다. 그러자 서울대 교수와 고고학자 등 5000여명은 “가치가 없으니 빨리 총독부 건물을 헐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 전 장관은 옛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축학적 가치를 확인하기 위한 조사를 지시했다. “알고 보니, 이 건물이 밑바닥만 이태리제 대리석이지 석조전 기둥과 뒤에 있는 모든 배경은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이었던 겁니다. 헐어서 옮기기도 어렵지만, 건축물로서 가치도 없는 건물이었죠. … 부근에 문화재관리국 자리가 있었는데 지금의 고궁박물관이죠. 임시 박물관으로 쓰겠다고 해서 문화재관리국 자리를 임시 박물관으로 착공했습니다. 가까운 곳으로 옮기겠다고 하니 반대 여론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대체할 임시 박물관 공간을 확보한 뒤에야 비로소 철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YS는 철거 논란이 일단락되자 비로소 이 전 장관을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대통령이 제게 속마음을 털어놓으시더라고요. ‘사실 점심 먹고 저 건물을 보면 소화가 안 됐다. 그런데 대통령이니 국민 여론을 감안해서 너무 강하게 추진할 수도 없었는데 잘 됐다’고 말이에요. 총독부 청사 철거로 교태전, 강녕전 복원 공사는 무려 1년을 앞당겨서 실시했고, 운현궁도 그때 다 복원됐습니다. 담도 예쁘게 다 쌓아 올렸고요.”
이 전 장관은 전주 이씨다. 어찌 보면 옛 조선총독부 철거를 강력히 밀어붙인 데에는 조상의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도 작용한 셈이다. 그는 “중종 임금의 여섯째 아들 덕양군의 14대손”이라고 소개한 뒤 “조선왕조 후손으로서 일제에 대해 뼈속 깊이 원한을 느끼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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