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에게는 한 사람(대통령)의 아래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정부 조직으로도, 또 실질적인 서열로도 국무총리 위에는 대통령밖에 없다. 삼권분립과 같은 ‘원칙론’은 일단 제쳐두기로 한다. ‘책임총리’냐, 아니냐의 문제로 시비를 벌이는 치졸한 상황은 좀 묘한 뉘앙스를 짓기도 하지만 말이다.
‘만(萬) 사람’의 萬은 천(千)의 열 곱이라는 숫자이지만, 동시에 ‘대단히 많은’이라는 뜻이다. ‘만인지상’이란 말의 ‘만인’은 ‘(거의)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백성(百姓)이 백 가지 성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백화점(百貨店)의 경우도 비슷하다.
필자도, 독자 여러분도 그 ‘만 사람’에 속한다. ‘그’가 우리 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필자의 부정은 단호하다. 그는 우리가 심부름꾼으로 선택한 대통령의 참모다. 선거 때 약속 서너 개만 돌아봐도 대통령이 자신을 뽑아 달라고 간절히 호소했음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나 민본(民本)의 뜻을 새삼스럽게 들먹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정권의 시대정신인가. 소위 권력의 인사들이 국민의 위에서 다스린다는, 군림(君臨)한다는 뜻에 충실한 언어가 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다. 정치에 물어보자. 만인지상을 누리기 위해 정치는 존재하는 것인가?
서양에선 문호(文豪) 괴테도, 철학자 헤겔도 각별하게 다룬 이 개념 시대정신, 곧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가 이 땅에서 이렇게 시대착오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착오(錯誤)는 착각이나 잘못이다. 서양의 ‘시대착오’인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은 그리스어 아나(ana·전 前)와 크로노스(khronos·시대)의 합체다. 시대에 뒤진 생각이나 언동(言動)을 이른다.
![]() |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가 사퇴 기자회견에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설명하는 말 중 하나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란 시대착오적 수식어가 어김없이 쓰였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이성계가 말머리를 돌려 왕(王)씨 성의 나라 고려를 쳤다. 성(姓)을 바꾼(易) 혁명, 즉 역성혁명이다. 고려의 신하들 중 일부는 이 불의(不義)를 용납하지 않고 개풍군 광덕산으로 들어가 새 왕조 조선에 문(門)을 닫아걸었다(杜). 두문불출(杜門不出)이다. 젊은 시절의 황희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반란세력은 두문동의 고려 충신들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한다. 관련 기록은 당시 순절(殉節)한 충신 중 한 사람인 성사제(成思齊)의 후손이 훗날 조상에 관한 일을 기록한 ‘두문동실기(杜門洞實記)’에 실려 있다. ‘두문불출’이 여기서 비롯했는데, 당시 그런 선비들이 은거한 곳(골짜기)이라는 뜻 두문동이 지도에는 몇 군데 더 있다.
![]() |
경기 파주에 있는 황희 정승의 동상. 청백리로, 큰 능력의 관리로 그 이름 아직도 거대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그런 왕조(王朝) 시기에 정승을 부르는 이름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었다. 더구나 ‘황희 정승’이라면 그 이름이 품은 뜻에도 어울린다. 혹, 그래서 황희 같은 어질고 유능한 이를 그리며 ‘국민이 주인이고 정치가가 심부름꾼인’ 오늘날에도 그 말을 쉬 못 버리는 것일까?
“… 이완용씨 들으시오 총리대신 저 지위가/ 일인지하 만인지상 그 책임이 어떠한가/ 수신제가 못한 사람 치국인들 잘할소냐 ….”(개화기 시가인 가사(歌辭) 중 한 대목)
수신(修身), 제가(齊家) 다음에 나라를 다스리고[치국(治國)], 천하를 평화롭게[평천하(平天下)]하는 것이 선비의 도리다. 사서삼경 중 ‘대학(大學)’에 나온다. 몸을 닦고, 집을 바르게 하는 것이 맨앞인데, 고대 이래로 이 모든 순서의 바탕은 ‘수신’이라고 해석한다.
수신 즉 몸(身)을 닦는(修) 일은, 사우나 드나드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만인의 심부름꾼이 된 현대에도 그 원리는 다르지 않다.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장 ceo@citinature.com
■ 사족(蛇足)
萬(만)자는 원래 전갈(scorpion)의 그림이다. 전갈의 그림글자를 언젠가부터 숫자(1만)로 썼다. 제 뜻 사라진 대신 萬자 아래에 벌레 충(蟲)을 붙인 글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말이 글자보다 먼저 만들어졌다. 어떤 사물의 글자가 없어 아쉬울 때, 먼저 만들어진 글자를 빌려와 뜻을 표현하기도 했다. 코를 그린 ‘코’라는 뜻의 자(自) 글자를 ‘나’ ‘자신’의 의미로 돌려 쓴 것이 그런 방식이다. 글자가 없어진 코의 새 글자로 自 아래에 다른 글자를 덧대 코 비(鼻)자를 만들었다. 문자학은 가차(假借)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만(萬)의 약자는 万(만)이다. 중국에서는 속자(俗字)로 이 글자를 함께 써오다 모택동 시절 ‘간체자 혁명’ 때 아예 萬자 대신 万자만 쓰기로 했다. 万자는 卍(만)자의 변형이다.
卍은 고대 인도의 범어(梵語·산스크리트)의 문자(기호)를 가져온 것이다. 힌두교 크리슈나 신 또는 부처님 가슴의 무늬를 그린 것으로 길상(吉相)의 좋은 뜻을 품은 글자란다.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는 불교, 사찰의 이미지로 활용한다. 메소포타미아나 그리스 문명, 초기 기독교에서도 이 이미지는 나타난다. 인류문명의 일종의 원형(archtype)으로 볼 수도 있겠다.
히틀러 나치즘의 상징 문양도 뿌리는 이 卍자다. 이 글자를 돌려 45도 세운 것이 독일말로 ‘갈고리 십자가’란 뜻의 하켄크로이츠다. 선전과 선동의 귀재였던 나치들도 이 卍자에서 큰 상징성을 보았던 것이리라.
萬(만)자는 원래 전갈(scorpion)의 그림이다. 전갈의 그림글자를 언젠가부터 숫자(1만)로 썼다. 제 뜻 사라진 대신 萬자 아래에 벌레 충(蟲)을 붙인 글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말이 글자보다 먼저 만들어졌다. 어떤 사물의 글자가 없어 아쉬울 때, 먼저 만들어진 글자를 빌려와 뜻을 표현하기도 했다. 코를 그린 ‘코’라는 뜻의 자(自) 글자를 ‘나’ ‘자신’의 의미로 돌려 쓴 것이 그런 방식이다. 글자가 없어진 코의 새 글자로 自 아래에 다른 글자를 덧대 코 비(鼻)자를 만들었다. 문자학은 가차(假借)라는 개념으로 이를 설명한다.
![]() |
万은 卍자의 변형이라고 한다. 산스크리트(범어)에서 온 卍자는 히틀러 나치즘의 갈고리십자가(하켄크로이츠)의 뿌리로도 알려져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卍은 고대 인도의 범어(梵語·산스크리트)의 문자(기호)를 가져온 것이다. 힌두교 크리슈나 신 또는 부처님 가슴의 무늬를 그린 것으로 길상(吉相)의 좋은 뜻을 품은 글자란다.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는 불교, 사찰의 이미지로 활용한다. 메소포타미아나 그리스 문명, 초기 기독교에서도 이 이미지는 나타난다. 인류문명의 일종의 원형(archtype)으로 볼 수도 있겠다.
히틀러 나치즘의 상징 문양도 뿌리는 이 卍자다. 이 글자를 돌려 45도 세운 것이 독일말로 ‘갈고리 십자가’란 뜻의 하켄크로이츠다. 선전과 선동의 귀재였던 나치들도 이 卍자에서 큰 상징성을 보았던 것이리라.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