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시키면 역사단두대에 오른다 “좋은 시절이 있었다.” 완장을 찬 사람에게는 돈 봉투가 생겼다. ‘완장’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으니 봉투를 주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시골 면서기는 담뱃값을 챙기고, 힘깨나 쓰는 공직자는 두둑한 봉투를 챙겼다. 급행료, 떡값, 뇌물, 비자금…. 완장에게 어찌 좋은 시절이 아니었겠는가. “불역열호(不亦說乎)” “불역낙호(不亦樂乎)”를 줄기차게 외쳤을 터다. 돈을 건네야 했던 사람들. 그들도 기뻤을까. 그들에게도 좋은 시절이었을까.
“이래서야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이런 생각에 ‘부정부패 일소’ 기치를 높이 치켜들었다. 한두 번이 아니다. 부패는 뿌리 뽑혔는가. 말뿐이었다. 일소하겠다던 사람이 부패를 만들어내는 ‘큰 완장’이었던 까닭이다. 수천억원을 챙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어디 이들뿐인가. 곳곳에 박힌 큰 완장이 계속 봉투를 챙기니 작은 완장이 좇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부끄러움을 알았을까. 의기투합해 봉투를 주고받자면 무슨 소리가 나오겠는가. “당연한 것 아니냐.”
부정부패를 당연시하는 과거 우리의 참담한 모습이다.
지금은 나아졌을까. 완장 왈 “좋은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덥석덥석 돈 봉투를 받아 쇠고랑을 차는 사람이 아직도 한둘이 아니지만 이런 말이 들리니 분명 달라진 것 같긴 하다. 그런데 ‘×피아’라는 말이 일반명사처럼 쓰인다. 관료사회, 법조계, 공기업에서 끼리끼리 짬짜미를 하며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 그들은 완장 중의 완장이다. 돈을 직접 받아 챙기면 뇌물이니 쇠고랑을 차지 않을 교묘한 방법을 쓴다. 바로 전관예우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정책이 돈벌이 수단으로 변해 나라는 엉망으로 변하고, 법의 정의는 왜곡되며, 공기업은 부실로 빼곡하게 채워진다. 나라 꼴이 제대로 설 리 없다. 부패일소 백년하청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 게다. ‘이 시대의 황희’도 분명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부패와의 전쟁. 성공한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돈 봉투 챙기는 수법이 교묘해진 것에서 ‘우공이산의 변화’를 읽게 된다. 왜 교묘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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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원 논설실장 |
공직자 부정청탁금지법. 20년 만에 나온 반부패 전쟁에 쓰일 칼이다. 무산시키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인다. 법무부가 알맹이를 쏙 뺀 ‘껍데기 김영란법’을 국회에 넘기더니, 국회 법사위 여야 의원들은 10개월 만에 심의를 하며 “위헌소지가 있다”, “억울한 공직자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실명제 개혁 전야에 나온 “뭉칫돈이 빠져나가 나라경제가 어려워진다”던 공갈과 비슷하다. 여당 원내대표는 국회에 국가개조위원회를, 야당 원내대표는 관피아방지특별위원회를 만들겠다고 했다. 김영란법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뭐가 그리도 복잡한가. 김영란법 원안을 통과시키면 될 일이다. 선량들이야말로 ‘완장 중 완장’이요 ‘새 정치’를 외치며 ‘헌 정치’를 고수해왔으니 비비 꼬는 말이 도무지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좋은 시절이 있었다고? 완장에게는 아직도 좋은 시절이다. 세월호 참사에 눈물을 한 바가지씩 쏟았을 이 나라 국민은 눈물을 글썽이며 완장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 이몽룡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금 항아리 맛난 술은 천백성의 피요(金樽美酒 千人血) / 옥쟁반 맛난 안주 만백성의 기름이라(玉盤佳肴 萬姓膏) /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은 눈물 흘리고(燭淚落時 民漏落) /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더라(歌聲高處 怨聲高).
강호원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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