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바른 목적의 선동은 사랑을, 그릇된 목적의 선동은 분노를 이끌어낸다고 한다. 국가와 사회를 흥하게 할 수도, 분열과 파멸을 부를 수도 있는 게 선동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일찍이 선동 기관과 매체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1901년 그는 ‘무엇을 시작할 것인가’라는 글에서 정치 신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신문은 집단적 선전자요, 선동자일 뿐 아니라 조직자이다.” 1912년 창간된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1917년 러시아혁명 성공의 이념적 무기였다. 이후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선전선동부를 두었다.
탁월한 웅변가였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대중을 선동하는 명연설로 당세를 확장했다. 그의 ‘충견’ 괴벨스가 이끈 선전선동부는 국민의 집단 이성을 마비시켜 국가를 침략전쟁의 광속으로 밀어넣었다. 레닌과 히틀러도 울고 갈 만큼 선동에 성공한 정치가들이 있다. 북한 김일성 세습왕조다. 이들은 외부 정보 차단과 반복적인 세뇌교육으로 3대 70년에 육박하는 개인숭배 체제를 구축했다.
김정은 치하에서도 노동당 선전선동부가 체제의 조타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최근 잦은 지도부 인사에도 불구하고 선전선동부 핵심 인사들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선전선동의 귀재로 알려진 김기남 당 선전비서 겸 선전선동부장은 김정일 치세 말기 함께 핵심 국정을 관장하던 김경희, 장성택, 리영호와 달리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13기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유임된 최태복 당 과학교육 비서도 선전선동의 사상전을 주도해온 인물이다.
세월호 참사 유족의 엊그제 청와대 앞 농성장에 시위꾼들이 모습을 드러내 논란이 일고 있다. 광우병 촛불집회, 한진중공업 파업 등 시위현장이면 빠짐없이 참가해온 시위 전문가들이다. 이들의 반정부 시위 유도를 유족들이 제지했다고 한다. 유족들의 이성적인 행동이 돋보인다. 아무리 정부가 미워도 유족의 슬픔까지 반정부 시위의 불쏘시개로 활용해야 되겠는가. 시위꾼들의 ‘선동병’ 치유는 국가 개조보다 더 어려운 과제인 것 같다.
김환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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