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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지음/푸른역사/1만8000원 |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방어에 나선 신립은 험준한 조령을 포기하고 남한강을 배후에 둔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왜군을 상대했다. 그러나 조선의 정예군 1만명을 끌어모아 나섰던 신립의 군대는 참패했고, 이후 조선군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왜군의 한양 무혈입성으로 이어진 탄금대 전투의 패배는 한국 전쟁사에서 실패한 전술의 대명사로 인식됐다. 초보적인 병법만 공부했어도 조령이 방어의 최적지라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당시 자타가 공인한 조선 최고의 무장이었던 신립은 왜 조령을 포기하고 탄금대를 선택했을까.
신간 ‘전략전술의 한국사’의 저자인 이상훈 박사는 당시 조선군이 방어거점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조령·단월역·충주성·탄금대의 지형과 풍향, 양측의 주요 무기 등을 면밀히 살핀다. 그리고는 신립이 탄금대를 방어거점으로 삼고 배수진을 친 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탄금대는 삼면이 강과 호수로 둘러싸여 있어 동쪽의 진입로만 막으면 됐고, 봄철에 서풍이 강하게 불어 조선의 원거리 발사 무기에 유리했다는 것이다. 또 가파른 조령에서는 조선의 주력인 기병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웠고, 왜군에 의해 후방이 차단돼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던 만큼 탄금대가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사 속에 등장했던 다양한 전략전술을 9개의 주제로 나눠 시대순으로 살펴본다. 1장 국가전략을 비롯해 보급전, 포위전, 속도전, 공성전, 도하전 등을 잘 보여주는 국가사업과 전투가 등장한다. 탄금대 전투는 6장 방어전의 사례다. 저자는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뒤 학군 ROTC 37기로 임관해 육군 중위로 전역했고, 그 후 다시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며 전쟁사 연구에 매진했다.
국가전략의 사례로 꼽은 건 김제 벽골제다. 벽골제는 오랫동안 저수지로 알려졌으나, 최근에는 방조제라는 주장도 제기되며 논란을 빚기도 했다. 4세기 백제는 왜 3㎞가 넘는 대규모 제방을 김제평야 일대에 건설했을까.
벽골제는 성토(흙을 쌓는 작업) 공사를 하는 데만 연 인원 32만명 이상이 동원됐다고 추정된다. 이 정도면 국가 존립에 영향을 줄 만한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저자는 4세기의 기후와 해수면 변화 등을 살핀 후 벽골제가 대규모 저수지인 동시에 만조 시에는 바닷물 유입을 차단했던 다목적의 시설이었다고 결론 짓는다. 그리고 백제는 이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이 일대에 대한 개발과 통제를 한층 강화해나갔다고 분석한다.
이어 신라의 김유신이 어떻게 고구려 영토를 관통하며 대량의 군량을 무사히 수송할 수 있었는가(보급전), 또 고려말 왜구와의 대규모 전투인 황산전투는 왜 해안이 아닌 내륙인 지리산 일대에서 벌어졌을까(포위전) 등의 흥미진진한 주제와 그 뒤에 숨겨진 전략전술을 소개한다.
저자는 우리나라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자 휴전국가임에도 전쟁사나 군사학이 홀대받고 있다고 안타까워 한다. 일본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특히 장기간의 군사정권을 거치며 전쟁사가 기피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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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한국의 전쟁사에서도 끊임없는 외침과 내란을 극복한 선조들의 전략전술이 녹아 있다”고 강조한다. 사진은 북관(지금의 함경도)에서 용맹을 떨친 고려, 조선 장수들의 업적을 담은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의 하나인 ‘일전해위(一箭解圍)’. 신립 장군의 활약상을 담았다. 푸른역사 제공 |
저자는 “한국은 문약하다는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전쟁사에서의 전략전술을 살펴보는 시도가 많지 않았다”며 “한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에 녹아 있는 전략전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고 강조한다.
박창억 기자 danie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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