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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 중 유일한 무신 유응부·서유견문 지은 유길준 등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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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5-06 21:01:45 수정 : 2014-05-06 21: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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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73> 기계유씨(杞溪兪氏) 유씨(兪氏)는 신라 때 아찬(阿飡)을 지낸 유삼재(兪三宰)를 시조로 하는 동원분관들이다. 문헌에는 97본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현재 확인된 것은 기계, 창원(昌原), 인동(仁同) 등 8개 본관이 있다. 그중에서 기계유씨가 대종을 이루고 있는데, 인구는 11만3000명 정도가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기계유씨는 유삼재의 후손인 유의신(兪義臣)이 신라가 망하자, 고려에 불복하고 기계현에 살면서 호장이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기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따라서 고려 전기에는 은둔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가문이 번창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기도로 이주한 이후 유득선(兪得瑄), 유선(兪?), 유승계(兪承桂) 3대가 출사하여 현달하여 가문이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는 9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으며, 그중 재상이 3명, 판서가 12명이 나왔다. 

기계유씨 시조인 유삼재 묘소 유삼재는 기계유씨를 비롯해 유씨(兪氏) 본관들의 도시조이다.
기계 유씨는 유의신의 종파인 동정공파(同正公派)를 비롯하여 월성군(月城君) 유승추(兪承樞)계통인 월성군파와 동정(同正)인 유진적(兪晋迪) 계통인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등 15개 파로 갈라져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대표적 인물은 사육신의 한사람인 유응부(兪應孚)와 ‘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등의 의서를 편찬한 유효통(兪孝通)이 있고, 대한제국의 김홍집 내각에서 내무대신을 역임하며 양력사용, 종두법(種痘法), 우편제도, 단발령 등 많은 개혁정책을 펼친 유길준(兪吉濬)이 있다.

◆기계유씨의 연혁과 인물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기계유씨는 고려 건국에 불복하고 향리에 머물렀기 때문에 고려 초·중기까지는 가문이 번창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기도로 이주한 후 유득선, 유선, 유승계의 3대가 조정에 출사하여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그 후 조선조에 들어와 두각을 나타내는 명문가문이 되었다. 특히,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유응부(兪應孚)는 기계 유씨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그는 키가 크고, 용모가 엄장(嚴壯)하고, 활쏘기를 잘하여 동생인 유응신(兪應信)과 함께 무과에 급제하였다.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평안도 병마절제사를 거쳐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으나 성삼문, 박팽년 등과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를 입었다.

그가 죽고 가산을 몰수했을 때,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전혀 재산이 없어 가져간 것은 방문 대신에 가린 거적자리 한 장 뿐이었다는 일화가 ‘동각잡기(東閣雜記)’와 ‘추강집(秋江集)’에 전하고 있다.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였던 유여해(兪汝諧)의 후손인 유효통(兪孝通)이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대사성과 집현전 직제학을 지냈다. 그는 문장(文章)과 의약에도 정통하여 전의감정(典醫監正)이었던 노중례(盧重禮)와 함께 약용식물을 정리한 향약채집월령과 의서인 향약집성방을 편찬하였다.

유효통의 재종제인 유해(兪解)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으나, 그의 자손들이 가문을 발전시켜 기계유씨를 명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유여해의 7세손이며, 참판 유해(兪解)의 아들인 유기창(兪起昌)은 연산군 때 만포진첨제절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었다가 직간(直諫)으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병조 참지(兵曹參知) 벼슬을 하고, 그의 아들 유여림(兪汝霖)은 한림(翰林)에 기용되었다. 유해의 손자이자 유기창의 아들인 유여림(兪汝霖)은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해 예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를 지냈으며, 그 후손들이 조선 중기에 명성을 떨쳤다. 

사육신 중의 하나인 유응부의 묘소 유응부는 사육신중의 하나로 유일한 무신이다. 재상으로 있으면서 청렴하여, 형을 받은 뒤 관에서 가산을 몰수하러 왔다가 거적대기만 가져갔다고 하는 일화가 전한다.
유여림의 아우 유여주(兪汝舟)는 신진사류로 조광조와 함께 기묘현량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한산에 임벽당을 짓고 독서와 서예로 일생을 마쳤다. 유여림의 아들 유강(兪絳)은 중종 때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와 대사간, 대사헌 등을 거쳐 첨지중추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한성부 판윤, 공조, 호조 판서를 지냈다. 그가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인재를 모아 가르쳐 문풍을 일으킴으로써 함경, 평안 양도 선비들도 과거에 많이 오르게 되었다.

유여림의 손자인 유홍(兪泓)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삼등공신에 오르고 기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는 종계변무(宗系辨誣)에도 공을 세워 광국일등공신(光國一等功臣)에 책록되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당시 석학인 조식(曺植)의 극찬을 받았다. 유대수(兪大修)는 선조 때 주서와 전적을 거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 등을 지냈고, 형제들인 유대진(兪大進), 유대일(兪大逸), 유대정(兪大禎), 유대경(兪大儆), 유대건(兪大建) 등도 선조와 광해군 때 벼슬을 하였다. 또한 유강의 손자 유대칭(兪大稱)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홍가신(洪可臣)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였던 유대일의 아들 유백증(兪伯曾)은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정사삼등공신(靖社三等功臣)으로 기평군(杞平君)에 봉해지고, 이조참판과 대사간을 역임했다. 그는 경상감사로 있을 때 윤선도(尹善道)의 실정을 논박했고, 대사간으로 있을 때 이조 판서 이성구(李聖求)를 물러나게 했고, 이조참판 때는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의 하옥(下獄)을 청하기도 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하여 항전을 주장한 척화파(斥和派)의 한 사람이었다.

유길준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생으로 서유견문을 지었다. 김홍집 내각에서 내무대신을 맡으며 단발령, 종두법 시행 등 갑오개혁을 이끌었으나, 실패하여 망명했다가 돌아왔다.
유대정의 아들 유수증(兪守曾)은 소북파 영수인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의 사위로, 류영경이 광해군 즉위 초 대북파에 의해 숙청되자 12년 동안 은거하였다가 인조반정 뒤 장령을 지냈다. 유강의 증손인 유성증(兪省曾)은 병자호란 때 강화에 들어가 파수대장으로 활약하고, 뒤에 강원도관찰사, 예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유성증의 아들 유황(兪榥), 유철(兪櫛), 그리고 재종질인 유계(兪棨)는 모두 인조 때 문과에 급제했다. 그 중 유황은 인조 때 관찰사로 지냈으나, 척화론을 펼쳐 두 차례 유배되었다. 유철은 경기도 관찰사와 대사간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명신으로 유명한 유계는 현종 때 예문관제학을 거쳐 대사헌,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예법의 근원과 흐름을 밝힌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지었다. 이 가례원류를 놓고 노·소론 사이에서 치열한 당쟁이 벌어졌다. 

유철의 손자 유척기(兪拓基)는 영조 때 노론의 원로로 영의정을 지냈으며, 당대 명필로서 금석학(金石學)의 권위자였다. 그의 사촌형 유최기(兪最基)도 대사성, 대사헌,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유척기의 조카 유언집(兪彦鏶)과 유언호(兪彦鎬) 형제도 영조와 정조 때 현달하였다. 그중 정조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돈령부사를 지낸 유언호는 정조의 신임을 받아 문화정치를 펴는 데 공을 세워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밖에 영조 때 알성문과, 문신정시, 문과중시에 각각 급제한 유언민(兪彦民)은 예조참판, 대사성, 강화부유수를 지냈으며, 대사헌과 중추부지사를 지내고 시문에 뛰어났던 유언술(兪彦述)도 기계 유씨이다.

기계유씨 시조 유삼재를 모신 부운재.
이렇듯 기계유씨는 숙종에서 정조 대에 걸쳐 가문이 크게 번창했는데, 숙종 때 좌참찬을 역임하고 글씨에 능했던 유하익(兪夏益·유수증의 손자)과 동부승지를 지내고 언관으로 있으면서 남인 타도에 앞장섰던 유명일(兪命一), 형방승지로서 희빈 장씨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며 소론을 숙청했던 유명웅(兪命雄), 영조 때 예조 판서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던 유명홍(兪命弘) 등이 뛰어났다. 그 밖의 인물로는 판서에 오른 유치선(兪致善)이 있다. 그 외 유헌(兪櫶·참판), 유하겸(兪夏謙·문과승지), 유명응(兪命凝·경상도관찰사) 등이 숙종 때 활약한 기계유씨 인물들이다.

영조 때는 영의정이었던 유척기와 종형이었던 좌참찬 유최기의 영향력 아래 수많은 기계유씨들이 활약하였다. 유척기의 종질인 유언호(忠文公·좌의정), 유건기(兪健基·참판), 유우기(兪宇基·승지), 유언술(兪彦述·대사헌), 유언국(兪彦國·참판), 유언민(兪彦民·대사헌), 유한소(兪漢蕭·함경도관찰사), 유언술(兪彦述·대사헌) 등이 활약하였다.

정조시대에도 노론 청류파를 주도하며 유언호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유한모(兪漢謨·형조판서), 유악주(兪岳柱·대사간), 유한인(兪漢人·장령), 유한령(兪漢寧·예조참의) 등이 있고, 학계에서는 유언집(兪彦鏶·이조참의), 유한준(兪漢雋·형조참의)이 있다.

이 외에도 영·정조 때 서예가로 전서와 예서의 대가인 유한지(兪漢芝), 순조 때 대문장가인 유한문(兪漢門), 성리학의 대가 유신환(兪莘煥), 한말 서예가로 초서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유창환(兪昌煥) 등도 기계유씨를 빛낸 인물들이다. 

서유견문 유길준이 국비로 일본과 미국 유학을 하고, 서양을 유람한 뒤 지은 기행문이다.
◆기계유씨 근현대 인물

기계유씨 집안에서 근현대 인물로는 대한제국 김홍집 내각에서 내무대신을 역임한 유길준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이며 한국 최초로 국한문을 혼용하여 현대문으로 서유견문을 저술하였다.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음력 폐지와 양력 사용과 종두법·우편제도·단발령 시행 등 많은 개혁정책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갑오개혁이 실패하고 12년간에 걸쳐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그 뒤 귀국해서는 교육과 계몽사업에 전념했으며, 저서로는 ‘서유견문’, ‘유길준전서(兪吉濬傳書)’가 있다.

그밖에 기계유씨 구한말 인물로는 유기환(외무대신 箕煥), 유성준(내무협판) 등이 꼽힌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활동한 인물로는 유민식(兪民植, 다른 이름은 정근·政根)으로,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5년간 옥고를 치른 후 사망하였고, 민족교육운동에 전념하고 조선일보 사장을 지낸 유진태(兪鎭泰)씨가 있다.

그 외 유일준(의학박사·경의전교수), 유만겸(충북지사·경학원부제학), 유억겸(연대총장·문교부장) 등이 활약하였다. 광복 후에는 유진오(兪鎭午)가 있다. 그는 법학자, 문인 겸 정치가였으며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하여 건국에 공헌하였다. 초대 법제처장을 역임하고 1967년 정계로 들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저서에는 ‘헌법해의(憲法解義)’ 등이 있고 단편소설로는, ‘창랑정기(滄浪亭記)’, ‘김강사와 T교수’ 등이 있다.

그 외 유상근(전 통일원장관·명지대총장), 유완창(전 부흥부장관), 유학성(예비역대장·안기부장), 유영준(국회의원), 유진영(국회의원), 유용식(국회의원), 유승준(국회의원), 유홍준(문화재청장)이 있고, 영화 ‘오발탄’ ‘잉여인간’ 등을 제작한 영화감독 유현목, 방송작가 유호, 유창균(계명대교수), 탤런트 유승호도 기계유씨 후손이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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