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잡아 놓고도 형사소송법 의존
안보범 보호 않는 美와 큰 대조 미국은 9·11테러로 2977명의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테러정보 수집체계에 대수술이 불가피했다. 수사 단계부터 적용되는 절차법을 강화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애국법이다. 테러 의심이 가는 외국인을 일주일간 영장 없이 구금할 수 있도록 했다. 전화통신과 이메일, 인터넷을 감청하고 테러의심분자를 언제든 기소할 수 있도록 했다.
전에도 이런 법이 없지 않았다. 테러방지 및 정보개혁법, 해외정보감독법 등은 전통을 자랑한다. 대형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정보기관의 업무 효율을 높이는 법을 도입한 결과였다. 심지어 이란 콘트라 스캔들이 터졌을 때도 전자정보를 감시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들 법의 요체는 스파이에 대해서는 인권 보호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앙정보국(CIA) 등 정보기관은 1년간 영장 없이 외국인 테러의심분자에 대해 도·감청한다. 전화를 바꿔도 추적한다. 과학기술문명의 발달에 따라 기존 수사기법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상황에 대응해 법을 개선한 것이다.
시선을 국내로 돌려보자. 정체불명의 인물 한 명에 의해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고 있지만 속수무책이다. 최고 정보기관이 휘청거리고 사법권의 한 축이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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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걸 부국장 겸 사회부장 |
우리 법을 보면 국가보안법이라는 실체법은 있지만 이 법의 운용을 다룬 절차법은 없다. 이 때문에 간첩을 잡고도 기소하려면 형사소송법에 의존해야 한다. 법 대로 하면 간첩도 인권 존중 대상이다. 일반 치안사범과 동일한 방식으로 증거를 확보하고 들이대야 한다. 고문을 통해서 밝혀낸 증거는 효력이 없다.
형사소송법에 독과수(毒果樹)이론이라는 게 있다. 나무에 독이 있으면 과실에도 독이 있다는 것으로, 위법하게 수집된 데서 나온 증거는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서양의 법이론이다. 이 법이론이 이번에 제대로 적용됐다. 검찰이 유우성씨의 동생 가려씨의 증언자료를 제출했지만 법원이 거부했다. 유씨의 친척 국모씨의 면담자료도 거부됐다. 이 이론의 종주국인 미국은 어떤가. 이런 일이 벌어졌더라면 결과는 뒤집어졌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테러리스트나 스파이에 대해서는 독과수이론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번 사건에서 검찰이 내놓은 증거를 살펴보자. 통신녹취 자료가 하나도 없다. 감청해서 증거로 내놓아봤자 채택될 리 없으니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테러의심분자에 대해 도·감청을 하고, 확신이 들면 증거로 채택하고, 판결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투명성을 앞세운다. 공안사범에 대해서도 치안사범과 똑같은 방식으로 수집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어둡던 시절에 공안당국이 저지른 죄로 인해 민주화된 이후에도 법체제의 허점이 수리되지 못한 탓이다. 지금 그 구과(舊過)에 당하고 있는 것이다.
존 로크 같은 자연법론자들이 주장한 사회계약설은 우리 나라를 되짚어보게 한다. 강도·강간·살인 등 치안범은 인권 존중의 울타리 안에 있지만, 안보범은 보호 범주 밖에 있다. 헌법 질서를 파괴하는 범죄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게 접근하고 있다.
우리의 법 잣대로라면 미국에서는 테러리스트나 스파이를 한 명도 잡을 수 없다. 도·감청이 불법인 것을 물론이고 미인계를 써서 손에 넣은 증거도 효력이 없다.
27년간 블랙으로 활동했던 요원이 자살을 기도하고 중국에 깔아놓은 휴민트가 잠적했다. 협력 파트너로부터는 의심을 받고 있다. 안보 자해 행위이다. 절차법만 갖추고 있었다면 이번 같은 내상(內傷)은 겪지 않아도 됐다. 빈대 잡으려다 집안을 거덜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대책을 강구하는 진지한 논의가 따라야 한다.
한용걸 부국장 겸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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