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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한국어에 존댓말이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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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3-07 21:10:19 수정 : 2014-03-07 21: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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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 높이기 등 불필요한 존대 남발
진심 담긴 존중의 표현으로 써야
올해는 봄 결혼식이 많아질 거라고 한다. 가을에는 결혼식을 기피하는 윤달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도 아들의 결혼을 준비하는 친구가 있다. 신붓감은 동갑내기인데, 처음 부모에게 인사하는 자리에서 아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며 자연스럽게 반말로 대화하더라고 한다. 친구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부부란 인생의 여정을 함께 꾸려나가는 동료이다. 책임도 권리도 동등하게 나눈다. 서열이 없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서로의 동등함을 일상화하기 위해서, 은연중에 상하관계를 환기시키는 존댓말은 없는 편이 좋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또 외국어권에서처럼 시어머니를 “앤!” “수전!” 하고 불렀다면 한국의 ‘시월드’가 훨씬 더 자유로웠을 거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언어가 생각을 지배한다는 것,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가 개인을 억압하며 허위의식으로 인한 사회적 낭비를 불러오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잇는 지점에 존댓말이 있다는 것도.

은희경 소설가
존댓말의 역학은 모든 사회에서 작용한다. 학교, 직장, 가정은 물론이고 모르는 사람끼리 어깨를 부딪치는 경우에도 우리는 존비법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말문을 열기 위해서는 상대가 위인지 아래인지 알아야 하고, 함께 일을 할 때에도 서열이 밝혀진 다음에야 대화가 활발해진다. 이렇게 존댓말에 예민하다 보니 언어가 과장되거나 왜곡된다. 요즘 우리 사회의 존대법 방식은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무조건 높이거나 무조건 친한 척하거나.

‘무조건 높이는 방식’은 특히 서비스업에서 심하다. “이만원이십니다” “식사 나오셨습니다” “화장실은 저쪽이십니다” “품절이십니다”. 이런 말은 사람이 아니라 돈과 음식과 화장실과 물건을 높이고 있다. 모든 호칭에 ‘님’을 붙이는 것도 불필요한 존대 방식이다. 고객님, 기사님, 주부님이 넘치다 못해 요즘은 약간 세련되게 ‘분’이 남발된다. 학생분, 아줌마분, 아저씨분으로 모자라 어린이 프로그램 사회자는 ‘거기 어린이분 나오세요’라고 한다. 가히 존댓말 인플레이다.

그런가 하면 ‘무조건 친한 척하는 방식’은 주로 호칭에서 나타난다. 백화점이든 슈퍼든 매장에 가면 종업원이 손님을 으레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른다. 식당에서는 또 남녀노소 불문하고 손님이 종업원을 부를 때 언니 아니면 이모다. 온 국민이 친척이다. 퍼블릭 영역의 언어가 퇴화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우리말은 섬세한 언어이다. 다양한 관계와 복잡한 상황에 맞는 어법을 만들어놓고 있다. 조사와 어미가 풍부하고 다양해 그것만으로 충분히 존비법을 정확하게 구사할 수 있다. ‘가라’ ‘가세요’ ‘가십시오’ 말고도 ‘가시게’라는 말이 있어, 상대를 높이는 동시에 반말을 할 수도 있는 식이다. 7가지였던 존비법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반말과 존댓말로 단순화돼 상하 구분을 하게 됐다는 주장도 있다. 영어는 위아래를 뜻하는 반말과 존댓말 체계가 아니라 가깝고 멀고를 따지는 친어와 격어 체계라고 한다. 가깝지 않은 사람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이다. 그 점에서는 우리말의 존대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존댓말이 아니다. 그 말 속에 깃들어 있는 권위의식이다. 노인과 젊은이, 선후배, 부부, 연인에게까지 존댓말이 권력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관계는 거의 없다. 매장에서 ‘이만원이십니다’라고 말하는 젊은이의 항변도 그걸 반영한다. ‘이만원입니다’라고 말했다가 손님들로부터 존댓말을 안 쓴다고, 건방지다며 야단을 맞기보다는 차라리 맞춤법을 지적 받는 게 낫다는 것이다. ‘민증을 까자’는 사람들의 의도는 팩트에 기초해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려는 게 아니라 하대를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나는 모든 관계가 위아래가 없는 편이 서로에게 좋다고 생각한다. 존댓말은 서로를 존중하는 표현으로만 쓰고 권력을 개입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래야 서로 진심 어린 관계가 되고, 감정 낭비 없이 솔직하고 실속 있는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은희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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