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한바탕 잘 놀았다고, 고마웠다고 말한 대상은 뒤에 남은 모든 이들이겠지만, 각별히 프랑스 당대 문단의 잘난 척 하는 비평가와 출판업자들에게 남긴 야유처럼 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2차 세계대전에 비행 대대 대위로 참전해 부상을 당하면서도 임무를 완수해 종전 후 드골 장군으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받았던 로맹 가리. 프랑스 외교관으로 세계를 누비던 그는 일찍이 소설가로 데뷔해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까지 받는 최고 작가 반열에 올랐다. 미국 여배우 진세버그와의 ‘숨가쁜’ 연애와 재혼도 로맹 가리의 아우라에 기여하는 세목이다.
그도 나이가 들면서 전문 평자들의 지루한 대상으로 전락해 새로운 작품을 발표해도 심드렁한 주례사 비평이나, 심지어 혹평까지 받는 처지에 몰렸다. 그가 60세 전후 의미심장한 두 개의 작품을 발표한다. 하나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낸 ‘자기 앞의 생’이고, 또 하나는 본명으로 펴낸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였다. 평자들은 에밀 아자르의 작품에 흥분하면서 한 작가에게 절대로 두 번 주지 않는 프랑스의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까지 수여하기에 이른다. 기실 같은 작가가 펴낸 노년의 역작 ‘이 경계…’는 가십거리로 치부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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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단을 쥐락펴락했던 소설가 로맹가리.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이 천재 작가의 전작이 국내에서 한글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
결과적으로 에밀 아자르라는 로맹 가리의 분신은 이른바 문단 전문가라는 이들의 고루한 선입견을 통쾌하게 전복시키는 쾌거였다. 로맹 가리가 유서에서 밝힌 에밀 아자르의 정체는 프랑스 평단을 ‘멘붕’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했다.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받은 작가요 프랑스 문단을 헤집어놓은 문제적 인물이라는 화제성을 떠나 로맹 가리의 작품 자체가 주는 매력은 크다. 국내에서 각별히 작가들이 사랑하는 작가로도 각광받는 로맹 가리에 대해 황인숙 시인은 “그 소설들을 읽을 때면 내내, 빗속에서 아코디언 반주에 맞춰 부르는, 청승맞고 달큼한 샹송을 듣는 것 같다”고 표현했고, 소설가 조경란은 “만약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도 놀라지 않게 된다면 그때 로맹 가리의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오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 로맹 가리가 올해 탄생 100주년이다.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로맹 가리 작품들을 순차적으로 초역해 내고 있는 출판사 ‘마음산책’은 ‘이 경계를 지나면....’을 포함한 7권에 이어 7권을 더 보탤 예정이다. ‘밤은 고요하리라’‘연’ ‘게리 쿠퍼여, 안녕’‘인간사’‘징기스 콘의 춤’‘마법사들’‘별을 먹는 사람들’이 그 목록이다. 번역가와 전문평자, 독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이벤트 ‘로맹 가리 소리 내어 읽기’도 준비 중이다. 파리에 비가 내리던 1980년 12월 2일 오후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던 로맹 가리. 그는 아들에게 남긴 편지에 결코 자신의 자살은 신경쇠약 탓이 아니라면서 ‘더 잘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간다고 썼다.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나는 마침내 나 자신을 완전히 표현했다”였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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