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종족의 보존이 이루어지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진리의 생명이 이어진다. 생명은 곧 사랑이다. 사랑의 양식을 먹고 자란 생명은 지혜의 빛을 발한다. 빛에 의해 반사되는 반사체가 아니라 진리의 빛을 내는 발광체이다. 깨달은 스승이 되는 것이다. 영적 구루 앞에 제자는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한다. 제자는 그래서 하고 싶다 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스승을 알아보는 제자는 매우 드물다. 더구나 스승 가운데 진정한 스승을 찾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원황의 ‘운명을 뛰어 넘는 길’에는 그에 대한 고뇌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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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민 대전대 외래교수·뷰티건강관리학 |
스승에 대한 성급한 판단은 유보해야 한다. 스스로 그 수준에 들어서지 못하고 단순히 감각에 의지한 이성적 잣대만으로 구루와 깨달음의 상태를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나와 가치관이 다르고 영적 세계관이 다를 때는 더욱 그렇다. 감각적 정보에 의지한 판단은 영적 수준을 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이는 자칫 잘못된 영적 판단에 의한 구루이즘(guruism)을 촉발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스승과 제자의 절대적 관계에서 영적 진리를 물려받을 수 있다. 이를 ‘진리와의 접촉[sat-sanga]’이라 말한다. 이 과정에 일어나는 신비체험은 때로 압도적인 감격하에 일어난다. 눈부신 빛, 벅차오르는 떨림이 수행자의 감각을 정복하는 것이다. 황홀한 쾌감이 온몸을 감싸는 임장감(臨場感)에 빠지며 변성의식에 들어간다. 이러한 경험은 요가, 선(禪), 카발라, 관상, 티베트 밀교, 선도 등의 여러 수행법과 종교적 체험에서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경험들은 수행 중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에 현혹되지 말고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 그러나 순수한 젊은이들은 영적 체험에 대한 은의(恩義)와 정에 이끌리는 경우가 많다. 자칫 구루이즘의 오류에 판단의 실수가 있는 경우 시한부 행복에 빠져든다. 분명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밀라레파의 십만송’은 마음을 닦아라 말한다. 티끌 없는 마음은 대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되비추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약사승이여, 최상의 스승은 자신의 마음이네. 바깥에서 스승을 찾으면 헛되이 자신의 마음을 버리려 애쓰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 선량한 약사승이여 만물이 오직 마음임을 알진저!”
류현민 대전대 외래교수·뷰티건강관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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