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같은 우스개는 그만큼 커닝이 일반화됐다는 방증이다. 오죽했으면 한 신학대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절대 커닝을 하지 않겠다”는 서명을 받았을까. 커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커다란 사회문제였다. 조선시대 과거장에선 남의 글을 베껴 쓰는 차술차작(借述借作), 두루마기 속에 커닝페이퍼를 감추고 들어가는 협서(挾書)가 끊이지 않았다.
권세 있는 양반집 자제는 실력 있는 사람 4∼5명을 데리고 들어가 함께 답안지를 쓰고 그중 잘된 것을 제출하기도 했다. 시험장과 연결되도록 미리 묻어놓은 긴 대통 안의 줄을 통해 문제지를 전달받고 밖에서 답을 작성해 들여보내려다 들켰다는 기록도 숙종실록에 전한다. 요즈음 휴대전화, 무전기를 이용한 시험부정과 판박이다.
공부벌레라는 미국 하버드대 학생들조차 커닝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했다. 지난해 5월 학생 125명이 재택시험에서 이메일, 휴대전화로 정보를 교환하며 답안을 작성했다가 60여명이 정학처분을 받았다.
대학생과 직장인의 시험부정이 잇따르는 요즘이다. 한국농어촌공사 직원은 승진시험 문제를 유출해 동료들에게 2000만원씩 받고 팔았다. 제주대 학생은 교수의 시험지 사본을 몰래 촬영했고, 연세대 로스쿨생은 기말고사 문제를 유출하기 위해 컴퓨터 해킹을 시도하다 적발됐다.
커닝은 노력 없이 성과를 내는 행위라는 점에서 도둑질과 진배없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른다면 또 얼마나 부정한 짓을 할 것인가. 커닝이 만연한 사회는 희망이 없다. 시험 부정행위의 만연은 반칙이 판치고 절차의 정의가 간과되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김환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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