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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63>영산, 영월신씨(靈山, 寧越辛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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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12-10 21:17:40 수정 : 2013-12-10 21: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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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영월 신씨(辛氏) 는

우리나라에서 ‘매울 신(辛)’을 쓰는 신씨는 9개 본관에 18만여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영산, 영월신씨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둘 다 고려시대 중국에서 넘어왔다는 8학사 중의 한명인 신경(辛鏡)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신경은 중국에서 건너와 고려 인종 16년(1138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평장사(金紫光錄大夫 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정의(貞懿)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가 영산, 즉 지금의 창녕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자신이 살던 중국 감숙성의 천축산(天竺山)과 창녕 영취산(靈鷲山)의 산세가 비슷해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영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고 전하고 있다.

신경의 선계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그 중 하나로 신씨 성은 중국의 하나라 제2대 계왕의 아들 4형제 중에 차남이 진(鎭)이었는데, 분봉할 때 성을 신(莘)씨로 하사하였으며, 그 후손이 중국 농서 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였다. 영주는 감숙성의 속현이며 농산(?山) 서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농서(?西)라 전해지는 곳이다. 그 후 신(莘)씨는 후손이 초 변(艸)을 제거하여 신(辛)씨가 되었다고 한다.

농서지역에서 장(張)·홍(洪)·엄(嚴)·곽(郭)·경(慶)·이(李)·신(辛)·지(池) 8성이 대를 이어 의형제를 맺고 살다가 고려에 건너왔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에 신경의 4세손인 신몽삼의 묘비에서 ‘태사공영주신지묘’라는 문구가 발견되어 그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 즉, 영산 신씨 초기에 영주를 본관으로 그대로 썼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다른 주장도 있다. 즉, ‘신씨성관고(辛氏姓貫考)’에서는 영주(寧州)는 중국에 없고, 우리나라 영변(寧邊)의 옛 지명이라 하며 신씨가 귀화한 성씨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에 신씨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경 이전 신시랑이라는 사람이다. 신시랑은 당나라 사람으로 엄시랑(영월 엄씨의 시조로 엄임의라고 한다)과 함께 신라에 사신(35대 경덕왕)으로 들어와서 머물러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신시랑의 후계는 알 길이 없어, 신씨 대종회에서는 신경을 도시조로 모시고 있다.

후손들은 신경이 처음 정착한 영산(靈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신경의 9세손에 와서 영월로 분관하게 되었다. 즉 영산신씨는 8대 신지화의 아들 대에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신천(辛?, 장자)을 파조로 하는 덕재공파(德齋公派)와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영산부원군(靈山府院君)에 봉해진 신혁(辛革, 차자)을 파조로 하는 초당공파(草堂公派)로 나뉘어지고, 신공근(辛恭近)의 아들인 중정대부(中正大夫) 신성렬(辛成烈)을 파조로 하는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로 갈라졌다. 그리고 신지화의 3자인 영월부원군(寧越府院君) 신온(辛蘊)을 파조로 하는 부원군파(府院君派)와 신지화의 4자인 이부판서(吏部判書)를 지낸 신한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후손들은 영월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영산신씨는 총 8만3798명이, 영월신씨는 총 6만74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포항에 있는 신몽삼의 묘 포항에 있는 시조 신경의 4세손인 신몽삼의 묘. 신몽삼의 묘에서 ‘영주신지묘’라는 글자가 나와 영산, 영월신씨가 영주신씨로 쓰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영산, 영월신씨의 연혁

신경을 시조로 하는 영산, 영월 신씨는 고려 후기에 가장 번창했다. 신경의 8대손 신시화의 아들 대에서 가세가 번창했는데, 판밀직사사를 지내고 덕재공파의 파조가 된 신천을 비롯하여, 좌찬성을 지내고 영산부원군에 봉해져 초당공파의 파조가 된 신혁, 영월부원군(寧越府院君)에 봉해진 신온, 이부판서를 지낸 신한이 바로 그들이다.

그 중 신천은 고려 성리학의 대가인 안향의 문인으로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판밀직사사에 올랐다. 신혁의 후손인 신예(辛裔)는 충혜왕 때 좌정언과 지신사, 첨의평리를 역임하였고, 취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신예의 아우 신부(辛富)는 공민왕 때 판개성부사가 되었으나 홍건적의 난 때 출전하여, 함종 전투에서 전사했다. 신예의 또 다른 동생 신순(辛珣)은 충목왕 때 대호군을 지냈고, 사윤으로 압록강 서쪽의 병마부사가 되어 참전했었다.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었으나, 신돈 일파에 가담하여 권세를 부리다가 무릉도에 유배되었다.

이렇듯 영산, 영월 신씨는 고려후기와 말에 신천강씨, 경주김씨, 철원최씨 등의 가문과 함께 고려를 이끄는 주요 가문의 하나로 번창했으나, 신돈(辛旽)의 몰락 이후 급격히 쇠퇴하였다. 신돈은 본래 영산(靈山)의 옥천사(玉川寺) 승려로서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한때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처음엔 토지개혁과 노예해방 등 혁신정책을 펼쳤는데, 이로 인해 귀족과 지주들의 미움을 샀다. 본인 스스로도 지나친 전횡으로 왕의 신임을 잃었으며, 귀족세력의 기반을 무너뜨리고자 천도를 건의하였으나 왕과 대신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결국 공민왕을 시해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 

창녕의 영산, 영월신씨 고가 영산, 영월신씨의 시조 신경은 자신이 살던 감숙성 천축산과 비슷한 창녕 영취산 아래 자리를 잡고 세계를 이어왔다.
신씨는 조선시대에 53명의 문과 급제자와 7명의 공신을 배출하였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참여했던 초당공파의 신유정(辛有定) 후손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인물들이 나왔다.

초당공 신혁의 후손에서 손자 신예가 좌정언과 지신사, 첨의평리 등을 지내고 취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신예의 아우 신부는 홍건적의 난 때 함종 전투에 출정하여 전사했다. 후손인 신유정은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참여하여 개국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고, 태종 때에 충청도 병마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와 평안도 도안무사(都按撫使)를 역임하면서 25회에 걸쳐 왜구를 격퇴하였다.

그의 아들 신인손(辛仁孫)은 세종 때 경상도관찰사와 도승지, 병조참판, 형조판서 등을 거쳐 예문관대제학에 이르렀다. 신인손의 아들 신석조(辛碩祖)는 세종 때 최초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여 호당(湖堂)의 효시가 되었으며 세조 때 이조참판, 대사헌에 이르렀다. 그는 문장에 능하여 ‘세종실록’과 ‘경국대전’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신석조의 손자이자 현감 신수담의 아들인 신영희(辛永禧)가 문명을 떨쳤다. 그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사마시에 합격을 했으나, 화를 경고한 동문 김굉필의 충고로 벼슬을 단념하고 직산에 가서 남효온, 홍유순 등과 죽림의 벗이 되어 학문에 정진하였다. 신인손의 6세손이며 군수였던 신진의 아들인 신종원(辛宗遠)은 선조 때 금부도사와 연천현감을 거쳐 호조 좌랑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신계영(辛啓榮)은 인조 때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조선인 146명을 데리고 왔다. 이 밖에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을 때 노모의 봉양을 위해 사임한 신윤(辛崙),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민폐를 끼치는 변절자 공호겸을 생포한 보성군수 신초(辛礎), 노모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흥양, 함평의 현감과 파주목사를 지낸 신응망(辛應望) 등이 있다. 

창녕 옥천사지 신돈이 태어나고 자랐다는 창녕의 옥천사지. 신돈은 옥천사 여종을 어머니로 두고 태어나고, 절에서 자랐다. 원래 청한거사였는데, 신돈은 그가 환속한 후 아버지의 성씨를 따라 지은 이름이다. 개혁정치로 귀족과 맞서고, 권력 전횡으로 공민왕의 신임을 잃어 실각했다. 실각한 후 옥천사는 철저히 파괴되고 신돈의 흔적은 지워졌다.
고려 충숙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덕재공파 신천의 후손에서는 신천의 아들인 신인거가 백이정 문하에서 문장과 학행을 쌓았고, 충숙왕 때 판통례문사와 경주판관을 거쳐 충묵왕 때는 정당문학을 역임했다. 공조판서를 지낸 신경운(辛慶雲), 직제학을 지낸 신재(辛齋), 호조판서를 지낸 신종선(辛從善),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에 오른 신은윤(辛殷尹), 선조 때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오른 신경행(辛景行) 등이 유명하다. 신경행은 병조좌랑을 거쳐 한산 군수로 나갔다가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정난삼등공신으로 영성군에 봉해졌다.

부원군파조인 신온의 후손에서는 광정대부로 문하시중에 오른 신중석(辛仲碩)과 홍주 목사로 홍건적의 난에 공을 세워 익찬공신에 책록된 신염(辛廉) 부자가 유명하다. 또 신숙거(辛叔据)의 아들로 신윤문(辛允文)과 신윤무(辛允武) 형제가 뛰어났다 이들은 중종반정 때 박원종과 더불어 반정에 공을 세워, 형인 신윤문은 정국공신으로 영월군에, 아우 신윤무는 정국공신으로 병조판서와 좌찬성을 거쳐 영천군에 봉해졌다. 하지만 정막개의 무고로 대역죄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당했다.

신중석의 9세손으로 부사였던 신보상의 아들인 신응시(辛應時)는 명종 초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와 정언을 지내고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선조 때 경연관이 되었다. 전라도관찰사와 대사간을 거쳐 홍문관부제학을 지냈다.

그의 아들 신경진(辛慶晉)은 인조 때 대사헌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그는 율곡 이이의 문인으로 선조 때 등과하여 병조 좌랑으로 한응인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류성룡의 휘하에서 종사관으로 전공을 세우고, 강릉부사와 성주, 충주의 목사를 역임하였다. 신경진의 4촌인 신경영(辛慶英)은 인조 때 이인거(李仁居)의 난을 평정하여 소무공신(昭武功臣)에 올랐다.

상장군파조 신성렬의 손자 신사천(辛斯薦)은 고려 말에 전공판서를 지내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곡강으로 낙향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신희수(辛希壽)의 아들로 재종숙인 신원에게 출계한 신초(辛礎)는 임진왜란 때 창녕의 화왕산성에 주둔한 곽재우의 막하로 들어가 전공을 세우고, 현풍 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판서공파조인 신한의 후손에서는 손자 신비가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내성군에 봉해졌으며, 증손인 신거는 충혜왕 때 등과하여 광정대부로 지문하찬성사에 이르렀고, 신한의 7세손인 신보안(辛保安)은 세종 때 선공판사와 광주목사를 역임했다.

그 외 인물로는 신균(辛均)이 있다. 그는 호조판서였던 신중선의 아들로 태종과 성종에 걸쳐 벼슬을 하였다. 처음에 음보로 벼슬에 나가 검교한성부윤이 되고 이어 첨지중추원사를 역임하고, 성종 때 지중추부사로 취임했다가 대관의 논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대전 뿌리공원 영산신씨 조형물.
◆영산, 영월 신씨 근현대 인물

영산, 영월신씨는 현대에 올수록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고 있다. 신태악(辛泰嶽)은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신공제(辛公濟)는 3·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신영락(辛泳洛)도 경남 창녕에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유명한 목가시인 신석정도 영산신씨의 인물이다.

영산, 영월신씨의 현대 인물로는 재계에서는 롯데의 신격호 회장과 농심의 신춘호 회장을 꼽을 수 있다. 농심의 신춘호 회장은 신격호 회장의 셋째 동생이다. 그 외 신석봉(마산크리스탈호텔 사장), 신해성(한국후지칼라 사장), 신갑득(부산일신여객 사장)이 있다.

정·관계 인사로는 국회의원으로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을 비롯하여 신상학, 신석빈, 신영주, 신경식, 신건(전 국정원장), 신기남, 신기하, 신도환, 신민선, 신병열, 신달수, 신경민 등이 있으며, 법조계에서는 신광옥(부장검사), 신교준(변호사), 신성국(판사), 신봉주(변호사), 신영무(〃), 신재송(〃), 진주근(〃), 신형조(〃), 신호양(〃)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신용태(계명대부총장), 신홍기(한양대교수), 신순기(동아대부총장), 신민교(해양대교수), 신일(경제학박사), 신흥일(부산수산대교수)이 있고 방송연예계에서는 신애라 등이 있으며, 극작가로는 신봉승씨가 있다(영산, 영월 구분없음).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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