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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81> 환생

입력 : 2013-09-05 21:04:38 수정 : 2013-09-05 21: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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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주인 맞은 폐허의 집 ‘추억’ 안고 새로 태어나다 # 더 문, 하나의 영혼을 가진 육체들이 만나다

요즘은 툭 하면 관객 1000만명이 넘는 영화가 나오고, 자본들이 몰려든 덕에 셀 수 없이 많은 영화들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주말에 가족과 함께 극장에서 보고, 컴퓨터 파일로 내려받아 보기도 하면서, 어떤 때는 너무 과식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를 많이 본다. 영화의 양만큼이나 많은 영화에 대한 정보가 넘쳐흐르지만, 정작 보고나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를 보기는 쉽지 않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나의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많이 보고나서는 속이 조금 헛헛한 것이… 아무튼 그렇다.

그런데 요 몇 년 동안 본 영화 중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영화가 한 편 있다. 외계에서 온 듯 묘하고도 낯선 이미지로 어필했던 글램룩 가수 데이비드 보위의 아들 던컨 존스가 감독한 ‘더 문(원제: Moon)’이라는 영화이다. 등장하는 배우가 고작 한 명이고 배경도 달로 설정된 어두운 세트와 그 주변 풍경이 고작인, 말하자면 아주 ‘미니멀’한 구성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달에 혼자 산다고 오해하고 있는 한 인간의 이야기다. 까만 화면에 작은 글씨로 “where are we now”라는 문장이 나타나며 영화는 시작된다. “여긴 어디지?”

막혀 있던 주방의 문을 아(亞)자 살을 응용한 한식 유리문으로 바꾸어 달았다.
이 영화는 어느 시대인지 알 수 없지만, 미래에 달에서 태양 에너지를 흡수한 청정에너지 ‘He3’라는 물질을 개발해서 인류의 에너지 문제가 해결되는 시점에서 시작된다. ‘Sarang(사랑)’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는 우주기지에서 3년 계약직으로 일하는 샘이라는 사나이가 에너지 채취를 하고 있다. 그는 지구로 돌아가 가족을 만나기만을 고대하며 며칠 남은 기간을 제대를 앞둔 말년 병장처럼 보내고 있다. 그는, 손꼽아 기다리던 돌아갈 날을 2주 남기고 채굴을 하던 중 예상치 못한 사고가 나서 정신을 잃는다.

장면이 바뀌고 침대에 샘이 누워 있다. 샘은 여기가 어디냐고, 기지에서 유일하게 말동무 노릇을 해주고 모든 일을 거들어주는 로봇 거티에게 물어본다. 거티는 작은 사고가 있었으며 조금 쉬면 정신이 들 것이라고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샘은 안정을 취하고 약간의 검사를 받고 나서 정상적인 일상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어느날 잠을 자다가 이상한 환영을 본 샘은 나가서 기지 밖을 살피려고 한다. 그러나 거티와 본사에서 강력하게 만류하자, 더욱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의적인 사고를 만들어 나가는 데 성공한다. 샘은 채굴 현장에서 흙더미에 반이 묻힌 작업 차량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를 구하게 된다. 그런데 그 남자는 영화의 앞부분에 나왔던, 사고로 쓰러진 샘이었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똑같은 용모와 똑같은 기억을 가진 샘이 부딪힌다. 같은 용모와 같은 기억을 가진 두 인간이 마주치며 서로의 존재에 대한 깊은 불신과 깊은 동정이 교차한다. 그들은 3년이 되면 몸이 점점 쇠약해지고 기능이 마비되어 더 이상 살 수 없는 달에서, 3년마다 갱신되며 일을 하도록 프로그램 된 복제인간인 것이다. 시간이 다 되면 그들은 지구로 돌아간다는 귀환선에 실리고 그 안에서 ‘처리’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뒤를 이어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또 다른 샘이 침대에 뉘이고 깨어나서, 뇌리에 심어진 기억으로 다시 ‘샘’으로서의 생을 이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혼은 하나이고 육체는 여럿이다. 요행히 육체가 순차적으로 일어나 활동해 주기만 하면 아무 문제없이 흘러가도록 되어 있었는데, 약간의 오류로 육체가 두 개, 영혼이 두 개로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무척 난처한 상황이다. 전제가 무너지고, 견고하게 버티어주던 배경이 무너져 내렸으며 존재의 의미도 수정해야 하는 본질적인 문제가 생겼다. 

오래된 담을 따라 스텔라 할머니가 50년 동안 가꾼 뜰이 남아 있다.
# 환생, 영원한 삶에 대한 꿈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사데크 헤다야트 저, ‘눈먼 부엉이’ 중에서

‘나’는 필통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필통에는 항상 사이프러스 나무 한 그루와 그 아래 인도의 요기를 연상시키는 곱사등이 노인과 검고 긴 옷을 입은 소녀를 그린다. 그런 ‘나’는 인도에서 장사를 하며 똑같이 생긴 쌍둥이 동생을 가진 아버지와 사원의 무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그런데 ‘나’의 삼촌, 즉 아버지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외모와 성격과 취향을 가진 쌍둥이 동생이 당연하게도 형의 아내를 사랑하게 되고, 그들은 ‘코브라의 심판’을 받게 된다. ‘코브라의 심판’은 두 남자를 코브라 한 마리와 함께 칠흑처럼 어두운 방에 가두어놓고, 코브라에게 물린 사람이 비명을 지르면 물리지 않은 사람을 구출해내는 방식이다. 둘은 방에 들어가고 이윽고 한 사내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사람들이 방문을 열고 잠깐 사이에 방 안에서의 공포에 엄청나게 늙어버린 삼촌을 구해낸다. 그러나 구해진 사람은 공포에 완전히 기억을 잃어버려 사실 그가 아버지인지 삼촌인지 알 수가 없다.

삶에 대한 엄청난 은유와 부조리함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을 가진, 이란의 카프카로 일컬어지는 사데크 헤다야트라는 작가를 ‘눈먼 부엉이’라는 책을 통해 만났다. 그는 예전에 ‘성’이라는 책을 통해서 카프카를 만났을 때 정도의 충격을 주었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기둥과 서까래 등의 부재는 이 집의 가장이 3년 동안 여유가 생길 때마다 마련해 쌓아올린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인간과 인생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비극적 상황과 비현실적인 상황을 초현실적으로 보여주며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유도한다. 또한 모든 등장인물들은 서로 겹치고 반복된다. 내가 삼촌인지, 아버지인지, 혹은 또 다른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나는 곧 모두이다. 그런 존재의 순환과 반복을 통해 우리는 유한하지만 영원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육체가 소멸되더라도 영혼은 남아서 다른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나는 것을 ‘환생’이라 하는데, 환생이라는 개념은 영혼의 불멸을 믿는 동양의 종교인 불교나 힌두교에서 볼 수 있다.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57억년 후에 세상에 출현하여 석가모니불이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인 미륵의 환생이나, 티베트 라마교의 교주 달라이 라마의 환생 등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래서 전적으로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안 믿는 것도 아닌, 다만 심정적으로는 받아들이고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존재의 기한이 정해져 있는 인간들은 늘 영원한 삶을 꿈꾸며 그것이 불가사의한 어떤 작용으로 인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바람은 환생이라는 아주 비현실적인 꿈으로 우리의 인식에 투영된다.

정말 영혼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영혼은 환생에 환생을 거듭하는 일정한 영혼들만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50년 된 세 칸 집을 되살린 ‘루치아의 뜰’. 막힌 벽을 뜯어내고 유리창을 달아 집 안으로 햇볕이 많이 들게 했다.
사진:박영채, 출처:www.studio-gaon.com
# 스텔라의 뜰에서 루치아의 뜰로?

오래된 도시 공주의 구도심에 위치한 ‘루치아의 뜰’은 1964년에 지어져 올해 나이가 50살이 된 작은 뜰이다. 그리고 뜰 옆으로 방 두 칸, 부엌 한 칸, 다락 한 칸, 다 합해 33㎡ 정도 되는 집이 한 채 놓여 있다.

50년 전 어떤 선량하고 가난한 가장이 아내와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평생 살아갈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준비해놓은 재료가 부족해서 짓다가 멈추고, 재료가 모이면 다시 집을 짓다가 떨어지면 또 멈추며, 무려 삼년 동안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 가장은 허무하게도 집을 짓고 고작 삼년 살고 세상을 떠났다.

집에 남겨진 아내와 아이들은 열심히 집을 가꾸며 살았다. 아이들은 다 커서 큰 도시로 나갔지만, 아내는 작은 마당과 담 옆으로 길게 만들어진 화단을 가꾸며 오래도록 살았다. 부인은 집 근처에 있는 성당을 열심히 다녔는데, 성당에서는 그녀를 스텔라라고 불렀다. 자식들은 장성해서 집을 떠나고 혼자 집을 지키던 스텔라마저 몇 년 전 세상을 떠나자, 오랜 세월 가족을 지켜보던 집만 혼자 남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집은 주인 없이 지내고 있었다.

스텔라와 같은 성당에 다니던 루치아라는 중년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시내에 집을 한 채 마련하려고 찾아다니던 중, 어느 날 차도 들어가지 못하는 한적한 골목에 있는 마음에 드는 집을 한 채 발견했다. 몇 년 동안 비어 있었는지 파란 철대문은 녹을 뒤집어쓴 채 기울어지고 건들거렸고 마당 한쪽에는 담장이 넘어지며 장독대를 덮쳐, 깨진 장독 조각과 깨진 블록 조각이 같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부인은 집의 크기나 위치가 적당하고, 무엇보다도 담 옆으로 가꾸어놓은 얇고 긴 화단이 맘에 들어 “더 생각할 것도 없다”며 덜컥 그 집을 사기로 마음먹는다. 그런데 그 집을 사고 나서야, 원래 주인이 자신과 같은 성당을 다니며 자주 만났던 스텔라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텔라의 뜰이 루치아의 뜰로 이어진 것이다. 얼핏 폐허처럼 보여서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외면당했던 그 집이, 사실은 가장 마음에 드는 새 주인을 고른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33㎡에 불과한, 너무 오래 입어 소매가 너덜거리는 겨울 스웨터처럼 낡은 집을 되살리는 계획을 했다. 우선 철거를 시작했다. 집을 덮고 있던 시간과, 때와, 한때의 사랑과, 한때의 슬픔과, 한때의 기억들을 적당히 걷어내기도 하고 적당히 남기기도 했다.

스텔라가 남겨놓은 살림의 흔적들을 하나도 버리지 말자는 루치아의 바램대로, 뜯어낸 재료는 다듬어서 새롭게 썼다. 부분부분 삭아서 내려앉았던 툇마루는 작은 탁자와 선반으로 다시 태어났다. 방과 방 사이에 놓여 칸막이벽 역할을 했었던 옷장은 마루로 옮겨져서 그릇을 담는 장식장으로, 깨진 항아리는 마당 여기저기에 흙을 담아 작은 꽃을 피우는 화분으로 거듭났다. 녹슨 대문과 거친 질감의 시멘트 기와는 원래 자리잡고 있던 위치에 그대로 놓아두었다. 그리고 투명한 플라스틱 차양은 같은 모양의 반짝거리는 얇은 철판으로 바꿔 달았다.

집은 남북으로 긴 땅의 모양을 그대로 따라 지어져서 남쪽이 막혀 있고 동쪽을 보며 앉아 있다. 그래서 들어갈 때 집의 정면이 아니라 옆구리가 보이게 되어 있다. 그 ‘옆면’을 ‘정면’으로 만들기 위해 벽들을 뜯어내고 유리창을 달아 집 안으로 햇볕이 많이 들게 했다. 좁고 어두운 다락은 천장을 뜯어내어 서까래를 노출시켜 높게 만들고, 원래부터 달려 있던 두 개의 창문은 틀을 그대로 살려 창호지만 새로 발랐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도 한국 전통 문양의 유리문으로 바꾸어 달았다. 옛 흔적들을 살리되, 새로 끼어드는 요소들은 굳이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현대의 장점들을 활용한 재료와 형태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도록 했다.

사람은 유한하지만 자연은 영원하다. 그것은 자연을 이루는 요소 하나하나에 영원성이 깃든 것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거대한 흐름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루치아의 뜰도 가꾸는 사람은 바뀌었지만, 자연의 흐름은 늘 푸르고 건강하게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에 이어진 건축도 영원하다. 우리는 오래된 집이 원하는 대로, 뜰이 원하는 대로 작업을 했고, 스텔라의 뜰은 루치아의 뜰로 환생하게 되었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 ‘사람을 살리는 집’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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