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신라 서역인 무인상, 불교 금강역사상 본 뜬 것”

입력 : 2013-08-14 20:44:23 수정 : 2013-08-14 20:44:23

인쇄 메일 url 공유 - +

신라사학회 10돌 학술대회서 임영애교수 주장
“이슬람권과의 교류 증거 아니다… 상인, 왕릉 수호역 맡겼을지 의문”
‘천년왕국’ 신라를 조명하는 학술대회와 전시회가 동시에 열려 눈길을 끈다. 신라사학회는 17일 경주에서 창립 10주년 기념 128회 학술발표회를 가진다. 골품제, 신라-일본 간 무역, 미술품을 통해 본 신라인의 서역인 인식을 다룬다. 국립춘천박물관은 13일부터 강원도 지역의 신라문화를 조명하는 특별전을 시작했다. 지금의 강원도 지역이 신라 사회에서 가졌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서역인’ 얼굴의 무인상, 신라-서역 교류의 증거 아니다”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신라 38대 임금 원성왕(?∼798)의 능에는 유독 눈길을 끄는 무인상이 하나 있다. 이국적인 생김새 때문이다. 딱 보기에도 한민족의 얼굴은 아니다. 부리부리한 눈, 우뚝한 코, 덥수룩한 수염은 서역인을 연상시킨다. 원성왕릉 무인상은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표현한 이슬람 세계의 문헌과 더불어 신라-서역 간의 긴밀한 교류를 증거하는 유물로 간주됐다. 경주대 임영애 교수는 이런 일반적인 인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인식과 재현-미술사적 관점에서 본 ‘신라와 서역’’이란 제목의 논문에서 “원성왕릉 무인상은 서역인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임 교수는 무인상이 보여주는 사실적 표현을 위해서는 서역인이 신라에 왔어야 한다는 견해를 소개하며, 무인상이 조성된 9세기는 신라가 극심한 혼란을 겪던 때라 서역인이 방문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전제했다. 설령 왔다고 해도 장사치에 불과한 서역인의 모습을 왕릉에 재현해 수호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원성왕릉 무인상.
그는 또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2만∼3만여명의 서역인이 거주하며, 심지어 군사역할을 담당했을 때도 황릉 수호의 역할을 맡긴 적이 없다”며 “신라에서만 특별히 서역인에게 왕릉 수호의 역할을 맡겼을 것이라고 상정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보였다. 그렇다면 무인상의 얼굴은 어떻게 된 것일까. 불교의 금강역사상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게 임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신라 왕릉 조각에 투영된 불교 미술의 영향을 고려하면 가능성은 충분하다”며 “사천왕상과 흡사한 갑옷을 입은 왕릉의 십이지신상, 불교 사자상을 연상시키는 능역의 사자상 등은 불교와의 관련성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다만 “중국인이 만들어 낸 과장된 모습의 서역인 이미지가 금강역사상이나 사천왕상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단서를 달았다.

◆잠에서 깨어난 강원도의 신라 문화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벌인 고대 삼국 간 힘겨루기에서 신라가 우위를 보인 것은 진흥왕(재위 540∼576)대에 와서였다. 이때 신라의 영향력은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지금의 강원도에 지배권을 확립했다. 강릉, 원주, 춘천을 중심으로 신라는 관리를 파견하고 백성을 이주시켜 신라 문화를 뿌리내리게 했다. 국립춘천박물관이 10월6일까지 개최하는 ‘흙에서 깨어난 강원의 신라 문화’ 특별전은 경주 외의 지역에 자리 잡은 신라 문화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강원도는 통일기 신라 불교의 성지였다. 오대산 신앙의 고향이었고, 신라말 풍미한 선종 9개 본산 중 2개가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다른 지역의 고승들 역시 강원도를 거쳐갔다고 한다. 전시회는 양양 선림원의 홍각선사비, 토제소탑 등과 더불어 고승 범일의 것으로 보이는 비편 6점을 선보인다. 

국립춘천박물관이 ‘흙에서 깨어난 강원의 신라 문화’ 전시회에 선보인 금동관모. 강원도 지역에 뿌리내린 신라 문화의 위상을 보여준다.
국립춘천박물관 제공
금속을 다루는 데 신라인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유물도 전시된다. 강릉에 파견된 고위 관리가 썼던 관모의 금제관식은 0.5㎜의 가는 다각형 금동실로 108개의 영락을 정교하게 엮었다. ‘현미경 수준’의 기술이란 평가가 가능하다.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종걸이로는 유일한 ‘선림원종 현가쇄’가 육중한 종을 버틸 수 있었던 과학적 원리를 밝혔다. 이용현 학예연구사는 “(종걸이가 감당해야 하는) 힘의 분산을 위해 꽈배기형으로 종걸이를 만들었다. 힘이 한 군데 몰려 늘어나거나 구부러지는 것을 방지하는 기술을 9세기 초에 고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매장풍습은 강원도 특유의 모습을 보인다. 동해시 추암동에서 출토된 인골을 분석한 결과 이 지역 신라인은 ‘가족묘’의 형태를 발전시켰다. 가족이 세상을 떠날 때마다 새로운 무덤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무덤을 함께 썼던 것이다. 추가로 매장할 때는 먼저 묻힌 사람의 뼈를 정리해 무덤 안쪽에 안치했다고 한다. (033)260-1500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김다미 '완벽한 비율'
  • 김다미 '완벽한 비율'
  • 조보아 '반가운 손인사'
  • 트리플에스 김유연 '심쿵'
  • 트리플에스 윤서연 '청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