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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완식이 만난 사람] 개성굿보존회장 지간난 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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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08-04 20:56:55 수정 : 2013-08-04 2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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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은 우리문화의 정체성 담고 있는 ‘살아있는 화석’ ”
타다 남은 꽁초의 한처럼 우린 아픈 시련을 견뎠고 높은 산 넓은 강에 수천 번 절을 했다. 시퍼런 작두 칼날 위에 덩실덩실 춤도 췄다. 설움 많은 인생 설움 설움은 눈처럼 쌓여 가고 가슴에 인동초가 됐다. 가쁜 숨 몰아쉬며 찾아든 아낙과 그윽그윽 신음하는 아픈 자들을 부여잡고 울음을 토했던 세월은 또 얼마인가. 세상사 버림받음을 스스로 위안하고 그것도 모자라 줄곧 줄달음치며 세상을 안으려 피를 토하지 않았던가. 살을 뜯는 굿판의 곡조에 피 배인 소지 한 장 받쳐들고 우는 뜻 그 누가 알리. 밤새워 불러온 신명에 치여 사는 죄다. 용서하라. 용서하라. 세상 어둠 끝까지.


개성굿보존회장 지간난(68) 만신의 파란만장한 ‘무가’(巫歌)다. 3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골목 안길에 자리한 그의 거처를 찾았을 때 그는 두 손 모아 합장 중이었다.

“부모에 버림받고 세상에 버림받았지만 늘 누군가를 위해 두 손을 모으게 됩니다. 수백 번 합장하며 기원 치성을 드리다 보면 제가 나비가 되어 훨훨 자유롭게 날게 됩니다.”

그는 늦은 밤까지 발원한다. 그렇게 빌다 보면 차츰 신들도 떠나고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 된다. 삶이 그를 속이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설움이 응어리져 눈물보를 터뜨린다. 그럴 때면 미친 듯이 실컷 울어 버리면 마음까지 후련해진다. 신당 앞에 엎드려 우는 날 밤에는 신에 안겨 포근히 잠을 자는 꿈을 꾸게 된다.

“무녀들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설움 속에 묻혀 살아간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그 끝 모를 아픈 시련을 견디어 온 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누구도 쉽게 돌을 던질 수 없을 겁니다.”

종교적 경전도 없이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무속의 길은 사람들에게 몰이해되기 십상이다. 일제시대엔 혹세무민한다고 내몰렸고, 개발시대엔 미신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요즘에서야 전통의 뿌리 차원에서 재조명되면서 예전보다는 인식이 조금 나아졌을 뿐이다. 무속은 어쩌면 가장 밑바닥 삶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왔다. 그러기에 천대와 멸시는 숙명처럼 따라다녔다.

“세상은 무녀들을 소용의 가치로 받아들인 만큼, 세상으로부터 유폐시켜 왔습니다. 기독교적 희생번제의 대상이라 생각하시면 이해가 될 겁니다.”

그는 진정한 무속인은 철저히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도 놓아버린 이들이라고 말했다. 그러기에 삶과 죽음을 노래할 수 있다. 경계에서 자유롭다는 말은 경계가 주는 보호성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거친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얘기다. 무병은 그것을 감내하기 위한 단련이라 했다.

개성굿 전승자인 지간난의 삶의 이력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경기도 고양에서 3남5녀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실비’라는 세례명도 받았다. 그는 7살에 6.25전쟁을 겪으면서 아버지와 언니, 오빠들을 잃게 된다. 아버지가 기관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학살의 대상이 된 것이다. 어머니와 자매 셋만 겨우 살아남았다. 이즈음 그는 영검한 소리를 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신이 내린 것으로 판단한 어머니는 답답한 마음에서 지나가던 스님에게 조언을 구한다. 어머니는 스님으로부터 딸을 내다 버리지 않는다면 나머지 딸마저 죽는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문산행 경의선을 탔어요. 중간 역에서 저 몰래 어머니는 내리셨지요. 자식들 모두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그리하셨을 거에요. 나머지 딸들만큼은 살려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였을 겁니다.”

기차에서 버려진 그는 종착역 문산에 도착해 갈 곳을 잃고 울며 헤매다 역 석탄창고에 들어가 자게 된다. 아침에 창고에서 그를 발견한 창고 책임자는 오갈 데 없는 그를 집으로 데려가 양녀로 삼는다. 그는 아홉 살 때 다시 신이 들어와 영검한 소리를 하면서 양부모 집에서도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된다.

“동네 아주머니가 파주 일대에서 개성굿으로 유명한 염병 만신 집으로 데려다 주었어요. 욕쟁이로 유명해 염병만 신으로 불렸던 그는 개성굿의 맥을 잇고 있는 조순자씨였습니다.”

그는 신어머니 조순자씨 밑에서 13살 때 내림굿을 받는다. 예견력이 뛰어나 어린 나이에 경기 일대에서 영험한 ‘아기 만신’으로 통했다. 그는 17살 때 신어머니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한다. 그로부터 내림굿을 받은 신딸만 50여명에 이른다.

개성굿 전수자이자 그의 수제자인 이유진(58)씨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한 엘리트다. 30세에 이유 없는 병을 앓고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 스승을 찾았다. 내림굿을 받고 건강을 회복한 그는 지난 28년 동안 스승 밑에서 개성굿을 전수받아 오고 있다.

무녀의 길은 평범함을 상실당하는 길이다. 그러면서도 무당은 자랑이 아니다. 모질고 모진 길이란 얘기다.

“무녀의 길은 저승 가는 길 만큼 험한 길이라 했습니다. 그러기에 선택은 스스로 해도, 무당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는 구차한 짧은 명을 잇기 위해 죽지 못해 무녀의 길을 가기도 하고, 누구는 집안의 희생을 대신 짊어져야 할 운명이기에 선택을 하지요. 그 순간 자신은 사라지고 또 다른 나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는 종종 지탄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화려한’ 무속인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럴 때면 깨끗한 한복 한 벌과 고무신 한 켤레로 만족했던 큰 무당들을 떠올려 본다.

“화려한 차림의 신이 된 양 사람들을 부리는 일부 무녀들의 궤를 벗어난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고통스러운 자, 아픈 자의 사정을 헤아릴 수 있도록 무녀의 발걸음마다엔 비움이 있어야 합니다.”

어린시절부터 애기만신으로 이름을 날렸던 지간난 개성굿보존회장. 그는 “무속은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살아 있는 화석’으로, 우리 문화의 원형을 찾아가는 길잡이”라고 강조했다.
무녀의 길도 여타 종교의 사제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그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무녀를 포함한 종교인들에게 묻는다. 세상을 다 들여다보는 듯한 말솜씨를 가지고 그렇게 사는 것이 두렵지 않는지.

그는 무녀들이 함부로 제자를 내는 것이 무속계의 혼탁을 불러왔다고 진단한다. 사실 이런 문제는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도 해당하는 사항이다. 무자격 사제 양산을 부추기는 부실한 사제양성 시스템에 대한 일침으로 받아들여진다..

“제대로 무당이 되기 위해선 주변 마을 세 곳을 돌아 ‘쇠걸립’을 해야 합니다. 집집마다 돌면서 영험한 말로 놋쇠로 된 숟가락, 젓가락, 주발, 대접 등을 받아 와야 하지요. 신통력이 없으면 문전박대를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모은 놋쇠 용기를 대장간에 가져가 녹여서 굿 도구인 방울, 칼 등을 만들게 되지요. 쌀을 모으는 ‘쌀걸립’도 같은 방법으로 이뤄집니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야 비로서 내림굿을 할 수 있습니다. 내림굿 과정에서도 ‘줄공수’라는 시험대를 거쳐야 합니다. 굿에 모인 사람들에게 일일이 연이어서 영험한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못하면 예전엔 멍석말이를 당했어요.”

신어머니 밑에서 혹독한 수련을 통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일부에서 내림굿을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무속계의 자정노력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입니다. 다만 무속인들이기에 그렇다는 편견은 없었으면 해요.” 다른 종교인들과 대등하게 바라봐 달라는 얘기다.

그가 계승하고 있는 개성굿은 황해도굿과 서울굿의 중간 형태를 띠고 있다. 황해도 굿이 거칠고 빠르다면 서울굿은 세련된 맛이 있다. 개성굿은 빠르면서 세련돼 경쾌한 맛을 준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남하한 개성만신들은 고향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파주 고양 김포 연천 등 경기북부지역에 거주하면서 무업을 이어왔다.

요즘 전국 굿들은 서울굿제로 획일화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개성 신당굿’이란 책을 최근 펴낸 민속학자이자 샤머니즘박물관 관장인 양종승 박사는 문화다양성 차원에서 개성굿에 주목하고 있다. 개성의 덕물산은 만신 사이에서 조종산(祖宗山)이라 불려지며 무속의 성지로 여겨졌던 곳이다. ‘태종실록’에는 왕이 영을 내려 덕물산 산신에게 바치는 축문을 지어 올리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궁에서 조차도 예를 올렸다는 얘기다. 일반 평민들 사이에도 덕물산은 무산(巫山)이라고 할 정도로 영산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토록 지배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에서 귀한 산으로 여겨진 것은 이곳이 최영 장군이 묻힌 적분(赤墳)과 그의 혼령이 모셔져 있는 최영 장군사가 있기 때문이다. 최영 장군 신은 무당들로부터 큰 영험을 갖는 존재로, 민중에게는 삶의 무사태평과 안녕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받들어졌다.

큰 만신 지간난씨는 “굿은 신앙인 동시에 문학이고, 음악이면서 춤이고, 놀이인 동시에 모든 예술의 뿌리”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시대 무녀의 또다른 존재 필요성은 무엇일까.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담보하고 있는 ‘살아 있는 실체’를 느끼고 향유하면서 우리 문화의 형식도 보게 되지요. 영(靈)의 문화, 신바람 문화의 원류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급변했던 20세기 이후 한민족은 중국의 사대와 일제 압박, 6·25전쟁 이후 서양 일변도 등 ‘남의 문화’로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샤먼문화는 우리 문화의 참모습을 찾아가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모두가 문화를 말하는 시대에 그의 말은 많은 것을 곱씹게 만든다. 

편완식 선임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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