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배현경·복지겸·김선평·권행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하며,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931년 고창성(古昌城·현 안동) 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견훤을 대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어 소백산맥 동남지역 대부분을 항복 받아 고려 통일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 되고, 대장군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후손들이 함안에 살면서 본관으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다. 사후에 고창칠현묘(古昌七賢廟)와 동수충렬사(桐藪忠烈祠)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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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경남 함안의 무진정. 조삼 선생을 기리며 후손이 지었다는 정자로 한국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꼽힌다. 무진정 낙화놀이가 유명하다. |
또 함안조씨 족보에서 조정을 ‘신라원윤(新羅元尹)’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도 잘못되었다는 주장이다. 또 원윤이라는 벼슬이 고려조의 벼슬 이름이기 때문에 ‘신라원윤’이라고 할 수 없다는 논리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영조 14년(무오년)에 편찬된 ‘무오보’를 들고 있다. ‘무오보’에는 고려대장군 원윤으로 수정되었으며, “고찰해보니 이전의 보첩에는 신라 원윤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집안에 소장된 옛 기록 중에 고려조에 벼슬살이하셨다 하였고, 또한 시조의 9대손인 전서공대에 조선이 건국되었으니 신라부터 고려에 이르는 약 500년 사이에 대수가 10대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불가하며, 또한 원윤이란 관직은 고려조의 관명이기 때문에 고려원윤임이 의심되지 않아 이렇게 기록한다”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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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함안조씨 응암재실. |
함안조씨는 조정 이후 여러 분파로 나뉘어 통판공파(通判公派) 충순공파(忠順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고죽재공파(孤竹齋公派) 산원공파(散員公派) 참지공파(參知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어해공파(禦海公派) 집의공파(執義公派) 판결공파(判決公派) 사과공파(司果公派) 우후공파(虞侯公派) 내헌공파(耐軒公派) 남계공파(南溪公派) 절도공파(節度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참봉공파(參奉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제학공파(提學公派) 덕곡공파(德谷公派)·전서공파(典書公派) 함경공파(咸鏡公派)가 있다.
함안조씨에는 시조 조정뿐 아니라 그의 10대 손인 생육신 조여가 있으며, 그의 후손이 번창했다. 함안조씨는 조선시대에 모두 13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그 중 문과 32명, 무과 16명, 사마시 91명이다. 현재 함안조씨는 8만1048가구에 총 25만9196명(2000년 통계청 발표)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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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어계 조여 선생 생가와 위패가 모셔진 서산서원. |
함안조씨의 시조 조정의 아들 조간(趙幹)은 중랑장을 지냈으며, 증손인 조시우(趙時雨)는 오위도영장을 지냈고, 조영준(趙英俊)은 형부상서를 지냈다. 이어 광정대부 정당문학을 지낸 조열(趙熱)의 자손이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의 아들 조희(趙禧)는 삼사좌윤을, 손자는 계림부참군을 지낸 조지흥(趙之興)이다.
또 조지흥의 세 아들이 모두 크게 되었다. 큰아들 조인계(趙仁啓)는 사헌부 감찰을, 둘째 조천계(趙天啓)는 봉익대부 판도판서를 지냈고, 셋째 조신계(趙信啓)는 오위도장을 지냈다. 10대손 조열(趙悅)은 공조전서(工曺典書)를 지냈다. 하지만,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와 정몽주 이색과 친교하면서 은둔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함안조씨의 번영은 고려시대 만큼은 못되었지만, 꾸준히 인물을 배출하는 명문가의 맥을 이었다. 특히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는 어계(漁溪) 조여가 유명하다. 그는 세종에서 성종 때까지 살았는데, 그의 할아버지가 공조전서를 지낸 조열이다.
1453년에 진사가 되고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세조가 단종을 죽이자 그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르고, 왕의 얼을 동학사에 모시고 함안에 있는 백이산(伯夷山) 아래에서 독서와 낚시로 여생을 보냈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서산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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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함안조씨 족보창간 기념비. 경남 함안군 군북면에 있다. |
조임도(趙任道)는 어계 조여의 5세손으로 호는 간송당(澗松堂)이며 조식(趙埴)의 아들이다. 인조반정 후 공조좌랑으로 임명되었으나, 노병으로 사직하고 부임하지 아니하였다. 사헌부지평에 증직되고, 함안의 송정서원(松汀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간송집’ 7권 4책이 있다.
영조 때 화가로 이름난 조영석은 군수였던 조해(趙楷)의 아들로 유학자 이희조(李喜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숙종(肅宗) 때 등용되어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그의 형제인 조영복(趙榮福)은 한성부우윤을 지냈으며, 조춘경(趙春景)도 학자로 유명했다.
조영복의 아들 조중회(趙重晦)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승지가 되어 사도세자를 변호하다가 무장(武裝)에 유배되었다. 그 후 예조·이조·공조판서를 역임했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조선 후기 화가로 유명한 조정규(趙廷奎)는 산수·인물 등을 잘 그렸으며, 조희룡(趙熙龍)은 오위장을 역임하고 시문과 글씨, 그림 등에 능하였다.
그 외 조평(趙平)은 찰방(察訪)을, 조봉원(趙逢源)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조영우(趙榮祐)는 진사시에 합격하여 첨지중추를 지냈고, 조근(趙根)은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충청도도사를 지냈다. 조석진(趙錫晋)은 화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고종의 초상화를 그린 공으로 영춘군수(永春郡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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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일본 유학 당시의 조소앙. 조소앙은 대한제국 황실에서 최남선 등과 함께 보낸 특파 유학생이었다. |
조희제(趙熙濟)는 구한 말 순국지사이다. 그는 전북 임실에서 출생하였으며,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열사와 의병들의 실적과 문헌을 수집하여 ‘염재야록(念齋野錄)’을 편찬하였다. 하지만, 그의 비사가 일본 순경에 탐지되어 문집도 압수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며 체발(剃髮:머리를 바짝 깎는 것)을 강요당하자,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함안조씨에서 독립운동가로는 조명하(趙明河)·조시원(趙時元)·조소앙 등이 있다. 조명하는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했으며,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육군대장을 독검으로 찔렀다. 거사 직후 붙잡혀 순국하였다.
조시원의 본명은 조용원(趙鏞元)으로 조소앙의 막내 동생이다. 상하이로 망명하여 양세봉 휘하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1933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하고, 한국광복군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총사령부 법무처장·정훈처장을 역임하였다.
조소앙(趙素昻)의 본명은 조용은(趙鏞殷)이다. 그는 경기 파주에서 출생했으며, 일본에 유학할 때 조선유학생친목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었다. 1913년 중국에 망명하여 신채호 등과 함께 항일단체인 대동당을 조직하였다. 1918년 길림에서 무오독립선언서를 기초였으며,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를 조직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민주공화제 헌법을 기초하고 임시정부의 국체와 정체의 이론 정립에 기여하였다. 그는 삼균주의를 표방했으며, 해방 후에는 1948년 남북협상차 평양에 갔으나, 실패하고 50년에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 후 북한에서 납북 인사들과 함께 평화통일운동과 북한체제 반대운동을 벌이다 1958년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가문에서는 그의 여섯 남매를 비롯해 무려 11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조정래(趙廷來)는 소설가이다. 전남 승주에서 선암사의 승려이자 시인인 조종현(趙宗玄)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국대 국문학과를 나왔으며, 대한민국 최고 작가 중 한 명이다. 1970년 월간 현대문학에 ‘누명(陋名)’과 ‘선생님 기행’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소설문예의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도서출판 민예사(民藝社)를 설립하여 대표를 지냈고, 한국문학 주간을 역임하였다. 대표 작품으로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이 있다. 주로 좌우 이념대결 과정에서 민족의 수난과 민중의 삶을 그렸다.
그 외 함안조씨 근현대인물로는 정관계 인사로 조시원(국회의원) 조성근(건설부 장관) 조주영(체신부 장관, 국회의원) 조경규(국회부의장) 조병규(국회의원) 조순(〃) 조홍래(〃) 조재봉(〃) 조일제(〃) 조헌수(〃) 등이 있고, 종교계 인물로는 조종현(시인, 선암사 승려)·조용기(순복음교회 원로목사)·조선출(목사)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조용구(배명학원 이사장)·조용섭(서울대 부총장)·조승제(서울대 교수)·조인제(의학박사)·조윤제(문학박사)·조옥라(서강대 교수)·조광래(연세대 교수)·조연현(문학평론가) 등이 있다. 법조계에서는 조영래(변호사)가 있으며, 재계에서는 조홍제(효성물산 회장)·조석래(효성물산 회장)·조민제(국민일보 회장, 조 원로목사 아들) 등이 있다.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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