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에서 동네란 집값·학군과 동의어다. 동네라는 단어가 주던 온기는 옅어졌다. 대신 그 자리에 건조한 숫자와 잇속 빠른 계산이 밀고 들어왔다. 23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춤추는 숲’은 이런 현실에 유쾌한 물음표를 던진다. 이 영화는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서 20년 가까이 ‘성미산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함께 품을 팔아 아이를 기르고 안전한 먹을거리를 공유하며 정을 나눈다. 다큐멘터리를 만든 강석필 감독은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지내는 모습과 이들의 소박한 꿈을 지켜보면서 ‘대도시 서울에서도 마을이 가능하구나. 이 동네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여러 꿈을 꾸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걸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고 밝혔다.

“관객이 극장을 나설 때 ‘저 사람들이 알콩달콩 잘 살아가는 게 부럽네. 우리도 한번 해볼까’ 하는 느낌을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성미산 마을은 1994년 이웃과 나의 아이를 함께 돌보자는 공동육아에서 시작됐다. 이후 대안학교가 만들어지고 마을 사람이 함께 운영하는 유기농 반찬가게와 밥집·찻집·옷 수선집·장애인의 자립을 위한 커피 공방 등이 생겨났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옛말이 있잖아요. 어린이집·학교 하나 갖고 아이를 안전하고 행복하게 기르기는 불가능해요. 빈틈이 있어요. 이걸 마을이 메워주는 거죠.”
강 감독 역시 2001년부터 성미산 근처에 살았다. 공동육아에는 2003년부터 참여했다. 마을에 살면서 얻은 것에 대해 그는 “두말할 것 없이 친구”라며 “먼 데 사촌보다 이웃사촌이 더 가깝다고 동네 친구들을 매일 보니 형제자매 같다”고 말한다.
“부모들이 어울려서 아이를 기르니 토론·합의하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어요. 아이를 재운 뒤 ‘우리 집에서 막걸리 한잔 할까’ 하면서 가까워지는 거죠.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관계들을 발견해서 너무 소중해요.”
강 감독은 이렇게 친해진 마을 사람들과 “은행의 도움을 많이 받긴 했지만” 함께 4층 집을 지어 살고 있다. 그의 동네 자랑은 끝이 없다.
“이 마을은 되게 재밌어요. 별 희한한 짓거리들을 다 해요. 축제는 물론이고요. 서울에서 누가 정월대보름에 지신 밟기를 하고 고사를 지내겠어요. 동아리도 많고요. 우리 동네에선 맞벌이 부모가 아무한테나 전화해서 ‘늦을 것 같은데 아이 밥 좀 먹여줄 수 있어?’ 하면 ‘물론. 필요하면 재울까?’ 이래요. 전국 어디를 봐도 동네 어른과 아이들이 이렇게 허물없이 살갑게 지내는 곳이 없을 것 같아요. 이런 관계망 속에서 자라고 사교육에 찌들지 않으니 아이들 얼굴이 너무 해맑아요.”
대안 공동체에 대한 환상처럼 ‘성미산 예찬’만 하는 건 아닐까. 그는 오히려 이 마을이 천사만 사는 곳이 아님을 강조했다.

“우리 마을에 대한 흔한 오해가 두 가지예요. 하나는 ‘저 사람들 정말 부러워, 완벽해, 이사 가고 싶어’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서울에 살면서 웬만큼 먹고살 만한 사람들이 지들만의 리그 만들어서 지들 자식들 잘 키워보자는 거 아냐’ 하는 거죠. 둘 다 양극단의 오해예요.”
그는 “성미산 마을이 다른 점이라면 감정이 상하고 갈등이 생길 때 수없이 토론하면서 슬기롭게 이견을 해결하는 훈련이 조금 돼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저처럼 돈 없는 다큐 감독도 살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 감독은 마을을 보면서 매력적인 다큐 소재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섣불리 손댈 수는 없었다. “마을의 섬세한 결과 사람들의 깊은 속내를 담지 않으면 방송국 교양 카메라와 똑같지 않겠느냐”는 고민이었다. 2년간 곰곰이 생각한 뒤 2007년 12월부터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갔다.
“마을 3부작을 만들기로 결정했어요. 1∼3부를 한꺼번에 끝내려 했는데 독립영화는 그러기가 어렵더라고요. 지금 2·3부는 90% 정도 촬영했어요.”
1부에서는 성미산 일부에 사립학교를 세우려는 홍익대학교재단과 이에 맞선 주민들의 싸움을 주요하게 그렸다. 관객이 쉽게 받아들일 가벼운 일상 대신 무거운 이슈에 초점을 맞췄다. 강 감독은 “싸움 자체보다 마을민들의 대처와 건강한 생활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며 “관객이 이들의 행복 바이러스에 감염돼 돌아갔으면 했다”고 설명한다. 영화에서 13살 이승혁군은 ‘성미산 아이들’이 가진 생각의 깊이를 보여준다. 이군은 “(홍익대학교재단이) 자기 땅에 자기가 짓는 건데 너는 왜 반대해”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생명에는 주인이 없어요. (그런데) 학교를 만들려는 이 땅에는 너무 많은 생명이 살고 있어요.”
‘춤추는 숲’에는 마을 사람들이 제작부터 개봉까지 품앗이로 참여하고 있다. 마을 주민인 배우 고창석·정인기가 발벗고 나선 데다 주민홍보팀 ‘춤추는 사람들’이 블로그·웹자보 등으로 영화를 알리고 있다. 강 감독은 앞으로 “더 말랑말랑하고 가벼운” 2·3부를 차례로 선보일 예정이다.
“2부는 아이들이 크는 걸 보여줄 거예요. 사내 애들 3명을 중3 때부터 찍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20대 초반이죠. 아이들이 어떻게 좌충우돌 사춘기를 거쳐서 마을의 일원으로 크는지 담았어요. 3부는 마을에 처음 둥지를 튼 1세대들 이야기예요. 이제 50대 중후반이 되거든요. 이분들이 그 나이에 어떤 꿈을 꾸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 보려고요.”
글·사진 송은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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