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북한이 억류 중이던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한국명 배준호)씨에 대해 신속한 재판을 통해 중형을 선고함에 따라 이미 방북 의사를 밝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 성사 여부에 더욱 관심이 쏠린다.
조선중앙통신은 2일 북한 최고재판소가 지난달 30일 배 씨에 대한 재판을 열어 "반공화국 적대범죄행위를 감행한" 배 씨에게 15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했다고 보도했다.
배 씨의 재판 결과는 공교롭게도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는 소식이 나온 직후 공개돼 눈길을 끈다.
카터 전 대통령이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에게 서한을 통해 방북 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미국 현지시간으로 1일(한국시간 2일 새벽)이다.
북한이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 추진설이 나온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배 씨의 재판 결과를 발표한 셈이다.
특히 북한은 2009년 체포된 미국 여기자 로라 링과 유나 리씨(각각 노동교화형 12년), 2010년 잡힌 미국인 아이잘론 말론 곰즈씨(노동교화형 8년)보다 무거운 형벌을 배 씨에게 선고해 미국을 강하게 압박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배 씨의 재판이 이례적으로 속전속결로 진행된 점도 북한이 극적 효과를 노린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북한이 지난달 27일 배 씨를 재판에 넘겼다고 밝힌 지 불과 5일 만인 이날 재판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북한은 2009년 4월 24일 미국인 여기자 2명의 기소 결정 사실을 공개했고, 그로부터 42일이나 지난 같은 해 6월 8일 재판 결과가 발표했다. 곰즈 씨의 경우에도 기소 결정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재판 결과가 발표되기까지 16일이 걸렸다.
카터 전 대통령이 미국 정부에 방북 의사를 밝힌 것도 북한의 초청에 따른 것으로 관측되는 점을 감안할 때 배 씨의 이날 재판 결과 공개는 북한의 치밀한 각본에 따라 이뤄졌을 개연성이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이 2010년 북한을 방문해 곰즈 씨를 데리고 나온 것처럼 이번에도 배 씨의 귀환을 위해 방북한다면 북한에는 미국과의 대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북한이 미국인을 억류한 상태에서 이뤄진 미국 전직 대통령의 방북이 한반도 긴장완화의 물꼬를 튼 대표적인 사례로 전문가들은 2009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을 꼽는다.
북한은 2009년 5월 2차 핵실험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로 궁지에 몰렸으나 같은 해 8월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북해 미국 여기자 2명과 함께 귀국한 것을 계기로 대화 국면이 만들어졌다. 이어 같은해 11월에는 스티븐 보즈워스 당시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전문가들은 지금 한반도의 긴장 수위가 높아진 상황에서 '카터 역할론'이 부상하고 있는 것이 북한의 이해에도 부합한다고 보고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이 성사될 경우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를 모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억류 미국인을 석방함으로써 인도주의 면에서 이미지를 제고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양 교수는 "카터 전 대통령은 1994년 김일성 주석도 만났기 때문에 할아버지 모방하기를 열심히 하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게는 최적의 면담 상대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카터 역할론'에는 거품이 없지 않으며 그에게 지나친 기대를 걸 필요는 없다는 시각도 있다.
김영수 서강대 교수는 "카터가 방북을 추진한다는 것이 현재 상황에서 긍정적 신호일 수는 있지만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한 상황에서 북·미관계의 구조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며 "특히 미국은 오는 7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미 관계의 속도를 높여 한국에 부담을 주려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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