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긴박했던 88서울올림픽 유치전 뒷이야기

입력 : 2013-04-26 21:26:08 수정 : 2013-04-26 21:26:08

인쇄 메일 url 공유 - +

KBS1 ‘다큐극장’ 1981년 한국 정부는 ‘88올림픽’ 유치 신청을 취소할 명분을 고민 중이었다. 유치 경쟁 상대는 일본 나고야였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 여겼다. 설사 유치한들 올림픽을 치를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한국은 이미 1968년 아시안게임을 반납하고 벌금을 물어 국제 망신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국내 사정도 발목을 잡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데다 석유파동과 외환위기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 유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국내 전시효과만 거두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7년 뒤 ‘88서울올림픽’은 159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KBS1 ‘다큐극장’은 한국 현대사를 세대·진영·이념을 넘어 바라보기 위해 네 가지 열쇳말을 선정하고 4회에 걸쳐 살펴본다. ‘경제 성장’, ‘민주화 노력’, ‘북한’, 그리고 올림픽을 기점으로 이뤄진 ‘세계화’가 네 가지 열쇳말이다. 첫 회로 27일 오후 8시에는 서울올림픽의 치열했던 유치 과정과 파급 효과를 들여다본다.

KBS1 ‘다큐극장’은 세대·이념을 넘어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기 위해 첫 번째로 ‘88서울올림픽’의 유치 과정과 파급 효과를 살펴본다.
전두환 정권은 뒤늦게야 당시 2인자였던 노태우 정무장관을 유치 책임자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유치위원장으로 앉혔다. 독일 바덴바덴으로 날아간 정 회장은 미국과 유럽이 일본 견제심리가 있음을 알고 희망을 가졌다. 자만했던 일본과 달리 한국 유치단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에게 꽃을 보내는 등 일대일로 유치운동에 나섰다. 한국은 IOC 실세였던 홀스트 다슬러 아디다스 회장의 지지를 얻으면서 승세를 굳혔다.

방송은 88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의 세계화가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국제사회에서 어떤 위치인지 확인하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달려온 한국이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는 계기였다는 것이다. 또 올림픽 1년 전, 서울에 쏠린 세계의 이목 덕분에 1987년 민주화운동에서 희생을 줄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오피니언

포토

원지안 '청순 대명사'
  • 원지안 '청순 대명사'
  • 이효리, 요가원 수강생 실물 후기 쏟아져…
  • 엔믹스 해원 '눈부신 미모'
  • 박한별, 남편 논란 딛고 여유 만끽…여전한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