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시대의 문제를 간파하고 개혁하려했던 선각자

입력 : 2013-02-22 20:56:49 수정 : 2013-02-22 20:56:49

인쇄 메일 url 공유 - +

한영우 지음/민음사/2만3000원
율곡 이이 평전-조선 중기 최고의 경세가이자 위대한 스승/한영우 지음/민음사/2만3000원


율곡 이이(1536∼1584)는 현대인에게 어떻게 기억되나. 5000원권 지폐 초상화의 주인공 또는 10만 양병 주창자, 아니면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의 대표 성리학자 정도로 기억할 것이다. 여성들에게 율곡을 말하면 그 어머니 신사임당을 떠올린다. 율곡의 출생지는 외가가 있던 강릉이고, 고향은 경기도 파주 율곡이다. 파주에 그를 모신 사당과 자운서원이 있다. 성균관에 배향된 동국 18명현의 절반 이상이 율곡의 학우 내지 후학들이기에 율곡은 조선 후기 선비들의 사표로 추앙받을 만하다.

율곡이 조선 사회의 큰어른이라고 인정하더라도 만약 그의 가치관이 현대인과 충돌한다면 율곡의 존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저자 한영우 교수는 “율곡의 학문과 생애, 삶의 방식을 들여다보면 민주주의를 한다는 현대인이 얼마나 부끄럽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가 꼽는 율곡의 위대함은 ‘자기 시대의 문제점을 긴 눈으로 내다보고, 온몸을 던져 고치려고 노력한 선각자였다’고 평한다. 고관대작이었지만 살림은 늘 쪼들렸고, 우유부단한 선조 임금을 깨우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간언했다는 대목에선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훗날 영조가 경연에서 ‘성학집요’를 읽다가 “만약 임진왜란 때 율곡 선생이 계셨더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라고 묻자, 검열관은 “그토록 나라가 파탕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답했다. 제왕의 지침서인 ‘성학집요’는 송나라 진덕수의 ‘대학연의’와 더불어 경연의 주교재가 되었다. 선조를 상대로 한 율곡의 진언은 처절했다. 어린 제자를 훈계하는 듯한 율곡의 매서운 질책을 20년 가까이 듣고도 끝까지 지켜 준 선조 또한 간단찮은 인물인 것 같다. 율곡이 애타게 강조한 개혁은 이후 조선 후기 300여년간 시차를 두고 현실화됐다. 율곡은 조선 초기의 창업 정신을 계승하면서 연산군 이후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출하자고 진언했던 것. 율곡이 강조한 공납 개혁은 대동법으로, 군역 개혁은 균역법으로, 군주의 표상은 영종·정조·고종으로 계승되었다. 서얼 차별은 개선되어 서얼에게 벼슬길이 열렸으며, 율곡이 제창한 향약은 기호지방 향약의 표준이 되었다.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율곡 이이는 조선 초기의 창업 정신을 계승하면서 대동법·균역법 등을 주장하며 연산군 이후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출하고자 애썼다.
율곡은 일찍부터 민주적 사상에 눈을 떴다. 집안의 후계도 서출의 두 아들에게 넘겼으며 집안의 노복들에게 함부로 형벌을 가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의 이런 분별력과 포용력, 애민정신은 타고났지만, 어머니 사임당 신씨의 감화에서 비롯됐다. 과거시험에 아홉 번이나 장원 급제할 만큼 천재 두뇌를 지녔지만, 정신적으로는 결코 행복한 인물이 아니었다. 한량이었던 아버지 이원수를 따라 평안도를 다녀온 사이 사임당이 사망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다 3년상을 마치자마자 가출해 한때 승려가 되었다. 19세 때였다. 말하자면 아프고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낸 것이다. 성리학이 국시였던 당시 불교에 귀의했다는 것은 시대의 이단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 사임당은 성품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어려서부터 유교경전에 통달했던 사임당은 글을 잘 지었고 바느질과 자수, 그림에도 뛰어났다. 하지만 사임당은 일생의 절반을 남편과 떨어져 지내며 고향에 남겨두고 온 친정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율곡은 이런 어머니의 가슴 아픈 삶을 지켜봤을 것이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오피니언

포토

원지안 '청순 대명사'
  • 원지안 '청순 대명사'
  • 이효리, 요가원 수강생 실물 후기 쏟아져…
  • 엔믹스 해원 '눈부신 미모'
  • 박한별, 남편 논란 딛고 여유 만끽…여전한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