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알야만… 고대 왕국으로의 시간여행
마치 16세기 마을로 들어온 듯한 착각
옛 궁궐서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밥알야만의 황홀경을 봤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식사 시간과 한 번의 검문을 빼고는 8시간을 줄기차게 달려 사나로 향한다. 예멘에서의 이동은 힘들지만, 창 밖에 볼거리가 충분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형이 독특하기에 아덴으로 가는 길의 풍경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산들로 둘러싸인 길을 갈 때 서늘한 공기가 느껴진다. 돌산 위에 집을 지어놓고 사는 오지부터 길가의 텔레비전 한 대 앞에 온 동네 사람이 모여 있는 작은 시골 마을까지 다양한 재미가 있다. 산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다가 점심 때 잠시 멈춘 산마을에서는 빗방울이 약간 떨어진다. 운전사가 큰 식당 앞에 차를 세웠는데, 안타깝게도 여자는 식당 안에서 밥을 먹을 수 없단다. 여자는 다른 밀실 같은 곳에서 밥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외국인 배려 덕분에 식당에서 먹을 수 있었다.
사나에 도착해 제일 먼저 한국 식당이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한국을 떠나 벌써 반년 넘게 여행을 하고 있으니, 한국 음식이 그리워질 때도 됐다. 한국에서는 그리 흔한 김치찌개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곳은 게스트하우스까지 겸하는 곳인데 내가 묵기에는 가격이 부담스러웠다. 예멘 사나에서 한국 사람을 만난 건 반갑지만, 숙소는 다른 곳으로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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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알야만 사람들. 카메라를 든 낯선 동양 여자가 신기한지 마구 모여들었다. |
아침에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중동을 여행하며 오랜만에 비가 오는 것을 보니 이것도 반갑다. 내가 묵은 숙소가 어디쯤인지도 모른 채 일단은 꼭 가보고 싶었던 사나의 중심지 밥알야만을 가본다. 다 찌그러진 미니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가서 내린 곳은 그 자체가 놀라움이라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곳만 보기 위해 예멘에 왔다고 해도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시밤도 놀라웠지만, 밥알야만은 더욱 놀랍다. 어떻게 아직까지 이런 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낮은 성벽 너머로 보이는 놀라운 건물들을 대하니 그냥 성큼 그곳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졌다. 일단 주변을 더 둘러보고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성문 옆에 있는 찻집이 눈에 띄어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2층 발코니에 ‘카트’(남용물질로 분류된 식물 잎)를 씹는 남자들이 줄지어 반쯤 누워있다. 차 한 잔을 시켜 놓고 성벽 안쪽을, 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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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알야만 시가지 풍경. 현대적인 도로·자동차와 오래전에 지은 흙빛의 건물들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
한참 후에야 나는 성벽 안쪽으로 들어가본다.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다. 16세기 어느 마을에 들어간 듯하다. 사람들은 하릴없이 길에 앉아 카트를 씹어댄다. 건물들은 도무지 이 시대의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금 이곳에 사람이 산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냥 누군가 방학숙제로 만들어 놓은 조형물 같다. 건물 외벽은 흙을 제멋대로 발라놓았다. 창문은 상식을 깨는 틀과 모양이다. 아무렇게나 흰색으로 칠해놓은 듯하다. 하지만 너무나도 감각적이다. 그 뛰어남이 예술적이다. 나는 이곳으로 숙소를 옮겨야만 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이곳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벽 안쪽의 숙소도 몇 군데 가봤지만, 그곳보다는 성벽 바로 앞에 있는 곳이 전경이 너무 좋았다. 창문을 열면 바로 이곳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을 예약해놓고 내일 오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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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알야만의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모습. 끝도 없이 펼쳐진 흙빛의 향연이 정감을 불러일으키며 눈의 피로를 풀어준다. |
사나 옛 시가지 입구인 밥알야만의 어느 건물이든 옥상에 올라가 보면 이곳 전경이 다 보인다. 사원만 우뚝 솟아 있을 뿐 다른 건물들은 야트막해 한눈에 들어온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웰컴 예멘”을 외쳐주고, ‘코리아’라는 말에 호의적이며, 카메라에는 더더욱 호의적이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사로잡는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동안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노란 비옷을 입으며 생각한다. 방수가 되는 차도르를 만들어서 이들에게 팔면 잘 팔리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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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사진을 찍기 시작하자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까지 몰려든다. 한 아이가 카트를 씹는 척하며 볼에 바람을 넣는 모습이 퍽 귀엽다. |
밥알야만의 작은 갤러리를 들어가본다. 그곳은 이 도시를 너무 좋아하는 외국인이 아예 눌러앉아 그림을 그려 전시와 판매를 하고 있었다. 불현듯 나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그림을 그리기에는 너무 좋은 곳이다. 하지만 그림을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현실이다. 그림을 그리는 주인과 이런 현실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결론은 ‘이곳이 그림을 그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것이다. 그것은 둘 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밥알야만에서는 잠깐 굵게 내린 비가 전부였는데, 숙소로 돌아와보니 ‘홍수’가 나 있었다. 비 때문이 아니라 하수도 시설 때문이다. 물이 무릎까지 차 도로가 유실돼 길을 건너는 것조차 힘들다. 마치 세찬 강물을 가로지르는 기분이다. 겨우 숙소에 도착해 짐을 정리하고 다음날 다시 밥알야만으로 향한다. 거리측정기가 달린 노란 택시를 타려고 했지만, 택시 잡는 일이 쉽지 않다. 온통 낡은 택시뿐이다. 아무튼 택시를 잡아 타고 밥알야만이 한눈에 들어오는 숙소로 옮겼다. 나는 이제 매일 밥알야만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점심 약속도 잊을 뻔했다. 예멘의 우기라서 비가 또 내린다. 노란 비옷을 입고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 ‘살타’라는 예멘 전통음식을 먹는다. 살타는 감자 등 야채와 고기를 잘게 썰어 끓인 음식으로 빵의 일종인 ‘난’과 함께 먹는다. 살타는 점심에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이다. ‘파하샤’라는 음식은 소고기를 넣은 것인데, 가격이 살타의 두 배이지만 맛이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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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수도 사나의 중심지인 밥알야만의 야경. 고대 왕국으로 떠난 시간여행처럼 황홀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
밥알야만이 더욱 독특하게 보이는 건 사나 여타 지역과 사뭇 다른 풍경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멘의 수도 사나는 도시화가 돼 현대적인 건물과 좋은 식당·사무실이 즐비하다. 그러기에 상대적으로 고풍스러운 밥알야만이 신비스러운가보다. 생각해보면 외국인이 보기에 서울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현대적 도시 중심부의 경복궁 등 고궁들은 일종의 ‘시간여행지’일 것이다. 하나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궁에 아무도 살지 않는 반면 예멘의 밥알야만은 아직 사람들이 사는 삶의 터전이란 점이다. 현대식 건물에 설치된 현금인출기(ATM)에서 돈을 찾는다. ATM의 해석을 “All Time Money(언제나 돈을 찾을 수 있다)”로 해 적어놓은 문구가 재미있다. 달러화와 예멘리알화를 선택할 수 있다. 비상금으로 달러를 조금 인출하고, 예멘에서의 여행 경비를 위해 리알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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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의 성인 남자들은 허리춤에 칼을 차고 다닌다. |
또 이곳에는 좋은 커피숍이 있다. ‘샤이’(홍차와 비슷한 차의 일종)를 많이 마시는 예멘에서는 커피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커피로도 유명한 예멘인데, 정작 예멘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예멘커피는 드립커피로 주로 쓰이는 ‘이르가체페’가 유명하고, 모카항의 모카커피도 유명하다. 원두 생산지인데 정작 이들은 안 마시고 전부 수출한다.
오랜만에 PC방에 간다. 예멘에서 다른 곳들은 한글로 된 파일을 읽을 수 없었는데, 이곳은 한글이 된다. 여행자들이 비교적 많은 곳이라 언어 팩이 설정되어 있다. 윈도우가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은 어색하다. 아랍어는 한국어와 반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기에 모든 윈도우 설정이 오른쪽에서 시작한다. 마치 화면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거꾸로 되어 있다.
다음 갈 나라는 아프리카 땅이다. 그곳으로 가는 방법을 여행사에 가서 알아봤다. “배편은 여기서 예약을 할 수 없고 항구에 가서 알아보면 있을 것”이라고만 한다. 직접 가서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 에티오피아가 가깝기에 분명 배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나에 있으니, 이곳을 충분히 즐기고 모카항 쪽으로 가보는 수밖에 없다. 내일 아침에도 밥알야만을 볼 수 있다는 기쁨에 잠이 든다.
여행작가·‘중동을 여행하다’ 저자
grimi7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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