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연일정씨는 의경 이후 자세한 세계를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연일정씨에는 두 개의 파가 존재한다. 하나는 고려 의종 때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을 1대조(一代祖)로 하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이며 다른 하나는 고려 때 감무(監務)를 지낸 정극유(鄭克儒)를 1대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가 있다. 지주사공파에는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정문예(鄭文裔)계가 있으며 감무공파에는 정사도(鄭思道)·정철(鄭澈)계가 있다. 이 두 파는 정습명, 정극유의 선계가 실전되어 합보(合譜)를 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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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문화재 행렬. |
지주사공파는 다시 지주사공(知奏事公)의 10세손을 파조(派祖)로 하여 8개 파로 나누어진다. 정몽주의 후손이 포은공파(圃隱公派), 정문예의 후손이 생원공파(生員公派), 정문계(鄭文繼)의 후손이 문계공파(文繼公派), 정문손(鄭文孫)의 후손이 문손공파(文孫公派)다. 정문비(鄭文備)의 후손이 사정공파(司正公派), 정문욱(鄭文彧)의 후손이 정랑공파(正郞公派), 정형지(鄭亨之)의 후손이 만호공파(萬戶公派), 정희손(鄭希孫)의 후손이 도사공파(都事公派)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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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의 손자이면서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노론의 영수였던 영의정 정호의 영정. |
지주사공파와 감무공파 중 조선조에서 크게 이름을 떨친 문중은 주로 감무공파이다. 감무공파에서는 조선조에서 4명의 재상과 3명의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반면에 지주사공파는 현직에서는 큰 이름을 떨치지 못하고 국난과 같은 유사시에 인물이 많이 나왔다. 그 이유는 포은 정몽주의 순절 이후 조선조에서는 연일정씨 지주사공파 가문이 경원(敬遠)시 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연일정씨는 현대에 들어와서도 정해영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연일정씨는 총 6만7418가구에 21만651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연일정씨의 연혁과 인물
연일정씨는 연일호장을 지낸 정의경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알 수가 없다가 고려 의종 때 와서야 추밀원지주사를 역임한 정습명을 1대조로 하는 지주사공파가 형성되었다. 또한 고려 때 감무를 지낸 정극유를 1대조로 하는 감무공파가 형성되었다. 이 두 파는 같은 연일정씨이면서도 선계가 실전되어 족보를 통합하지 못하고 각각 족보 편찬과 종친회 등을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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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정씨 지주사공파의 파조인 정습명을 모신 남성재 전경과 단소. |
시조 정습명(鄭襲明)은 고려 예종 때 향공시문과(鄕貢試文科)에 올라 옥당과 한림을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지주사에 올라 형양군(滎陽君)에 봉해졌다. 그는 의종이 원자였을 때 시독(侍讀)으로 있었기 때문에, 의종 즉위 후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의종이 즉위한 후에도 방탕함을 일삼고 직언을 마다하지 않았고 의종이 그를 멀리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스스로 약을 먹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의 3세손 정인신(鄭麟信)은 태학박사, 정지태(鄭之泰)는 전서(典書)를, 5세손 정종흥(鄭宗興)이 진현관제학(進賢館堤學)과 감문대호군(監門大護軍)에 올랐다. 6세손 정림(鄭林)은 판도판서를, 그의 큰아들 정인수(鄭仁壽)는 군기감을 지냈는데 그가 정몽주의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둘째인 정인언은 전공판서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정유(鄭裕)는 직장(直長)이었다. 정광후는 상주목사를 지냈으나 정몽주 순절 이후 영천에 은거하다 이후 강압에 의해 공조판서를 제수받았다. 따라서 정몽주는 파조 정습명의 10세손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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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영정. |
포은 정몽주는 1337년(충숙왕 6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다. 공민왕 9년에 장원급제를 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치고 13년엔 병마사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여진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후 전농사승, 예조정랑과 사성을 거쳐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우왕 때는 대사성(大司成)과 삼사좌사(三司佐使)를 역임하였으며 창왕 때는 대제학이 되었다.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우고 그 공으로 문하찬성(門下贊成)의 벼슬을 받고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에 봉해지고 좌명공신이 되었다.
그는 문장은 물론이고 외교에도 뛰어나 명나라와 왜에도 여러 차례 사신으로 다녀왔다. 원과 명의 교체기라는 긴박한 국제정세에서 고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힘을 썼으며 이성계와 함께 여진과 왜구를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또한 성리학에도 밝아 개성에는 5부 학당을,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학문을 진흥시켰으며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구제에도 힘을 쏟았다.
하지만 요동정벌 이후 군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최영을 제거한 후 역성혁명을 꾀하자 고려를 유지한 채 개혁을 하려는 정몽주와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정몽주는 이성계의 아들이며 조선의 3대왕이 된 태종 이방원의 문객이었던 조영규에 의해 개성 선죽교(善竹橋)에서 피살되었다.
이방원과 정몽주가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진 ‘하여가(何如歌·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와 ‘단심가(丹心歌·이 몸이 죽고 죽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는 지금도 유명하다.
그 후 그를 죽인 태종은 정몽주를 복권시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 대제학 겸 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으로 추증한 뒤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손자인 정보(鄭保)는 예안현감과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나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그만뒀다. 후에 성삼문 등 사육신 사건에 대해 처형의 부당성을 직언하다가 정몽주의 후손이어서 극형은 피하고 단성으로 유배갔다. 이 때문에 지주사공파는 또다시 화를 받게 되어 벼슬길에서 멀어졌다. 그 후손 중에서는 정유성(鄭維城)이 정승에 올랐고 판서로 2명이 있으나 대체로 벼슬과는 거리를 두었다.
포은 후손 중에 큰아들 정종성(鄭宗誠)은 이조참의를 거쳐 첨지중추원사를 지냈고 둘째아들 정종본(鄭宗本)은 사예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또 정세아(鄭世雅)·정의번(鄭宜藩)·정대임(鄭大任)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했으며 정수번(鄭守藩)은 선조 때 내금위장을 지냈다. 또한 정유성은 포은의 9세손으로 인조 때 문과에 올라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예조·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또 구한말 의병을 일으킨 후손으로는 정환직(鄭煥直)과 정용기(鄭鏞基)가 있다.
감무공파
연일정씨 감무공파는 지수사공파와 달리 조선조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상신 4명이 배출되고 대제학도 3명 배출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인 송강 정철(鄭撤)이다.
감무공파 1대조 정극유는 고려 때 감무(監務)를 지냈다. 그의 6세손인 정사도(鄭思道)는 충숙왕 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밀직부사를 거친 뒤 공민왕 때는 동북면상원수와 도순문사를 역임하고 우왕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오르고 오천군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정홍(鄭洪)은 우왕 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조에 들어와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지냈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오성군에 봉해진 정후는 삼중대광에 올랐다.
송강 정철은 돈녕부판관을 지낸 정유침(鄭惟沈)의 막내아들이다. 그의 큰누이는 인종의 후궁이 되었고 둘째누이는 종실인 계림군의 부인이 되었다. 하지만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연루되자 큰형은 귀양길에 죽었고 아버지는 연일 등지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송강은 열살 때 창평현 등에서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후에 창평현의 절경을 읊은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지었다.
정철은 27세이던 명종 1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이 되었다가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에 들어갔다. 당쟁의 와중에 동인에 들어갔던 정철은 다시 서인의 거두가 되어 이발(李潑)과 맞섰다. 그러다 밀려나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때 지은 것이 ‘관동별곡(關東別曲)’이다. 선조 때 잠시 우의정에 올랐으나 다시 동인에 밀려 명천·진주·강계 등지로 귀양살이를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에서 풀려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또다시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강화로 낙향한 뒤 병사했다. 사후에 김장생(金長生) 등의 상소로 관직이 복구되고 문정공(文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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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문인, 정치가로 유명했던 송강 정철의 묘소. |
그의 손자인 문경공(文敬公) 정호(鄭澔)는 우암 송시열 제자로 노론의 영수가 되고 영의정에 올랐다. 또한 정호의 손자인 정종(鄭宗)은 대제학을 지냈고 증손 정이환(鄭履煥)은 참판과 제학을 역임했다. 또한 송강의 방계 혈손으로는 영조 때 형제정승으로 이름을 떨친 정우량(우의정)과 정휘량(좌의정)이 있으며 구한말에는 신미양요 당시 강화진무사로 재직한 정기원(鄭岐源)과 김홍집 내각에서 법부협판을 지낸 정경원(鄭敬源)이 있다. 정낙용(鄭洛鎔)은 농상공부대신을 지냈고 일제로부터 남작(男爵) 칭호를 받기도 했다. 반면에 같은 가문의 정동식(鄭東植)·정재건(鄭在健)은 일제 강점에 항의해 자결하기도 했다.
연일정씨 현대 인물
연일정씨에서는 현대에 들어와서도 정해영(국회의장)·정구영(공화당 초대의장)·정운갑(국회의원, 새누리당 정우택 최고위원의 부친)·정종택(국회의원)·정승화(육군대장)·정호영(국방부장관, 국회의원)·정재철(국회의원)·정창화(국회의원) 등 정관계와 학계·법조계 등에서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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