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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설화를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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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양반가 후손이 아니라
유복한 사대부 집안의 엘리트
명량해전 승리로 이끈 철쇄는
왜란 200년 후 도입, 사용 근거없어
온전히 전략전술로 승리했다는 결론
이순신 평전 -420년 만에 다시 본 임진왜란과 이순신 / 이민웅 지음 / 책문 / 2만2000원

이민웅 지음 / 책문 / 2만2000원
이순신은 몰락한 양반의 후손이 아니라 유복한 사대부 집안 출신이며 1597년 명량해전에서 사용했다는 철쇄 사용은 허구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이순신이 받은 형벌 가운데 ‘백의종군’도 계급장을 박탈당한 병졸 신세가 아니라 군관까지 거느린, 일종의 직위해제 차원의 처벌이라는 연구결과가 책으로 나왔다.

해군사관학교 이민웅 교수는 최근 펴낸 ‘이순신 평전’에서 이순신을 민족의 성웅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에 돋보기를 들이대고 역사적 사료를 통해 고증했다. 이 교수는 과거 군사정권의 편의성에 따라 드라마나 이야기책을 통해 성웅으로 그려낸 것을 사실대로 벗겨내고 있다. 특히 후대에 덧칠해진 설화를 걷어내고 ‘있는 그대로의 이순신’에 초점을 맞췄다.

우선 정유재란 때 명량해전에서 사용했다는 철쇄 얘기다. 명량해전은 우리나라 전쟁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승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백의종군(직위해제)하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상소를 선조에게 올리고, 철쇄를 사용해 일본 전함 130여 척을 수장시킨다.

이 교수는 책에서 철쇄 사용에 대해 “명량해전 당시나 직후의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다”며 “철쇄설이 담긴 문헌이 나오는 것은 왜란이 끝난 지 200년쯤 뒤인 18세기 말인데, 그 주요 내용을 검토하면 설화라는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철쇄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풀이했다. 울돌목 양안이 워낙 급물살이어서 당시의 전쟁 기술로는 철쇄를 양안에 걸칠 수 없었으며, 전비 마련에 애를 먹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 명량해전 대승은 오로지 지형지물과 썰물 밀물을 적기에 이용한 뛰어난 전략 전술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난중일기에 나오는 전라우수사 김억추라는 인물은 원래부터 용력이 뛰어났는데, 수군 수백 명의 힘으로도 양안에 걸지 못한 철쇄를 맨손으로 혼자 걸었다는 데서 이 설이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순신이 TV 드라마 등에서 묘사하듯 몰락한 가정형편 때문에 어려운 생활을 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전쟁 중에 주인(이순신)의 병수발을 위해 집에서 여종을 네 명이나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은 집안형편이 좋은 편이었음을 증명하는 단서가 되지 않을까? (중략) 모친만 이순신 곁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모친을 모실 노복들이 여러 가정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중략) 요컨대 이순신은 명망있는 사대부 가문에서 나름대로 유복하게 자라면서 조선 성리학에 기반을 둔 유학적 교육을 받으며 엘리트로 성장했다.”

또 백의종군은 직책 없이 종군하여 공을 세우게 하는 조선 군사제도 특유의 처벌법이라고 했다. 이순신은 휘하에 군관을 두고 보좌까지 받았다고 설명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직위해제에 해당한다. 계급이 모두 강등되고 노역에 동원되는 것으로 알려진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4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곳곳에 서 있는 이순신 동상처럼 ‘박제화된 이순신’을 거부한다. 성웅이라는 이유 때문에 진면목이 가려져 있던 이순신의 생애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도록 이끌어준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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