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냉정한 승부의 스포츠세계에는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다’고들 한다.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러한 예측 불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남자배구는 그동안 예측 불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1995년 삼성화재 창단 이후, 삼성화재는 실업배구 슈퍼리그 9연패, 2005년 출범한 프로배구에서도 2007∼08시즌부터 2011∼12시즌까지 5연패를 포함해 8시즌 중 6시즌이나 정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1995년 이후의 한국 남자배구의 역사는 삼성화재와 나머지 팀 간의 대결이라 불러도 무방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LIG손해보험(이하 LIG)은 한번도 강팀이라 불리지 못했다. ‘2인자’ 자리조차 현대캐피탈과 대한항공의 차지였고, LIG는 ‘만년 4위’로 불렸다. 1976년 금성배구단으로 창단 이후 단 한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이랬던 LIG가 최근 열린 2012 수원컵 프로대회에서 36년 만에 ‘우승의 한’을 풀었다. 수원컵 우승의 기세를 몰아 2012∼13시즌 V-리그(10월 개막 예정) 접수까지 노리는 LIG의 수장 이경석(51) 감독을 지난 1일 서울의 모처에서 만났다.

‘독이 든 성배’라 불렸던 LIG 감독을 맡은 지 1년도 되지 않아 팀의 숙원이던 우승 타이틀을 안겨준 이 감독은 선수들과 구단 관계자에게 공을 돌렸다. 이 감독은 “잘났든 못났든 날 믿고 따라와 준 선수들과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구자준 구단주와 권중원 단장에게 감사하다”며 소감을 밝혔다.
이 감독은 “이번 수원컵 대회를 앞두고 우승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내가 추구하는 배구 색깔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과 그동안 승부처마다 무너졌던 LIG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했다. 확실히 이번 대회에서 LIG 선수들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천적이던 대한항공, 현대캐피탈을 조별예선에서 꺾었고 결승전에서는 ‘최강’ 삼성화재마저 격침시켰다.
LIG의 수원컵 우승에는 이 감독이 지난 시즌 단행한 파격적 조치가 큰몫을 했다. 이 감독은 지난 시즌 중반, 부상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던 용병 페피치를 과감히 퇴출시키고 국내 선수들로만 리그를 운영했다. 그는 “부임 첫 시즌에 성적을 내야 한다는 심적 부담이 컸다. 무리해서라도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릴 수 있었지만 후일을 위해 국내 선수들의 경험을 쌓게 해주는 것을 택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러한 선택은 국내 선수만 참가하는 대회인 수원컵 우승이라는 최상의 결과로 돌아왔다.
◆대학 배구계의 최고 감독, 프로배구 초년병 감독이 되다
이 감독은 모교인 경기대에서 17년이나 감독직을 맡으며 대학배구 최고의 감독으로 군림했다. 그런 만큼 배구에 대한 주관도 뚜렷했다. 이 감독이 선수들에게 가장 중시하는 것은 예의범절과 ‘팀 없이는 선수 없다’식의 팀워크다. 또한 좋은 선수란 ‘감독의 의중을 잘 읽고 감독이 추구하는 배구를 잘 따라와 주는 선수’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부임 첫해부터 과감한 트레이드로 선수들에게 충격요법을 가하는 동시에 LIG의 배구 DNA 자체를 바꾸기 시작했다. 주전 세터였던 황동일을 대한항공으로 트레이드했고, 주전 레프트 임동규와 리베로 정성민을 현대캐피탈로 보내고 백업 세터인 이효동과 백업 공격수 주상용을 받아왔다. 흔히 ‘세터놀음’이라 불리는 배구에서 주전 세터를 내주고 다른 팀의 백업 세터를 받아오는 것은 분명히 LIG의 손해였다. 그러나 현역 시절 명세터였던 이 감독은 이효동을 집중 조련해 주전 세터로 키워냈고, 이효동은 이번 컵대회에서 감독의 기대대로 맹위를 떨쳤다. 이 감독은 “그동안 LIG의 고질적 약점은 ‘확실한 주전세터’의 부재였다. 현재 이효동에 대한 만족도는 50% 정도지만 감독의 의도에 충실하게 따라주는 좋은 세터인 만큼 LIG의 세터 갈증을 해결해줄 적임자”라고 밝혔다.
이 감독은 패배주의에 물들어 있던 선수들에게 프로의식을 심어주며 동기부여를 했다. 그는 “부임 이후 선수들에게 왜 열심히 연습을 해야 하는지를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내 지론은 프로란 ‘열심히’가 아니라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하기 위해선 연습을 열심히 해야 하고 연습에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시합은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선수단의 분발을 촉구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가 바로 36년 만의 우승이었다.

‘프로배구 한 해 농사는 용병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다. 정상에 오른 팀은 곧 가장 뛰어난 용병을 보유한 팀이었다. LIG가 V-리그에서도 판도를 뒤흔들 복병으로 지목받는 것은 이름값만으로는 역대 최고 용병인 가빈 슈미트(전 삼성화재)를 능가하는 카메호 드루티(26·쿠바)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이 감독은 “과거 세계청소년대회 감독 시절 카메호를 보고 한눈에 ‘물건’임을 직감했다. 그때 카메호의 등을 두드려주며 격려해줬던 기억이 있다”며 카메호와의 남다른 인연을 소개했다.
카메호는 라이트와 레프트를 두루 소화할 수 있다. 이 감독은 “카메호가 2m7의 장신임에도 서브 리시브가 뛰어나 이경수와 함께 레프트로 기용하고 레프트에서 공격시 허리통증에 시달리는 김요한은 라이트에서 공격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컵대회에서 절정의 공격력을 뽐낸 김요한과 LIG의 ‘심장’이자 살림꾼인 이경수, 그리고 카메호가 이룰 삼각편대는 어느 팀에 견줘도 뒤질 게 없다는 분석이다. 이 감독은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 리시브를 도맡는 이경수의 몸 상태가 팀 성적과 직결될 것이다. 매년 부상에 시달렸던 이경수의 몸 상태는 현재 너무나 좋다”고 말했다.
지난 시즌 삼성화재와 대한항공 양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궂은일을 도맡는 수비형 레프트 석진욱과 곽승석이 있기에 가능했다. 부상없이 건강한 이경수는 두 선수에 전혀 뒤지지 않는 만큼 LIG의 올 시즌이 기대되는 이유다. 이 감독은 “김요한과 이경수의 백업 역할은 전천후 공격수 주상용이 맡을 것이다. 더불어 상무에서 제대해 돌아온 센터 하현용 덕에 센터진도 풍부해져 지난해보다 전력은 급상승했다”며 이번 시즌의 지각변동을 예고했다.
인터뷰 내내 이 감독은 담담하면서도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평소에도 머릿속은 배구 생각만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LIG 배구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전하는 말을 물었다.
이 감독은 “지난 시즌 V-리그 최하위를 기록하면서 팬들께 아쉬움을 안겨드렸는데 이번 수원컵에서 팬 여러분도 LIG가 달라진 것을 느끼셨을 것”이라며 “이번 V-리그에서 선수와 감독, 프런트가 일심동체가 돼 LIG팬들의 이번 겨울이 신명나는 겨울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포부를 밝혔다.
이 감독의 LIG가 남자배구에서 그동안 퇴색됐던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스포츠의 기본 전제를 되살릴 수 있을까? 돌아올 ‘배구의 계절’이 기대되는 이유다.
글=남정훈 기자, 사진=김범준 기자
■ 이경석 감독은 ?
▲ 출생:1961년 3월 8일 (대구광역시)
▲ 신체조건:1m86, 91kg ▲학력:부산동성고-경기대
▲ 주요 경력: ●1987∼1994 고려증권 선수(세터) ●1994∼2011 경기대학교 배구부 감독 ●2006 청소년 배구대표팀 감독 ●2011년 8월 하계유니버시아드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1년 9월∼LIG 손해보험 배구단 감독
▲ 출생:1961년 3월 8일 (대구광역시)
▲ 신체조건:1m86, 91kg ▲학력:부산동성고-경기대
▲ 주요 경력: ●1987∼1994 고려증권 선수(세터) ●1994∼2011 경기대학교 배구부 감독 ●2006 청소년 배구대표팀 감독 ●2011년 8월 하계유니버시아드 남자배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1년 9월∼LIG 손해보험 배구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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