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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우리 안의 일제 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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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8-14 21:41:13 수정 : 2012-08-14 21: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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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청산 못하고 곳곳서 남용
진정한 광복 이뤘는지 묻고 싶다
광복절 아침이다. 벌써 예순일곱 번째다. 사람으로 치면 환갑도 넘어 고희에 가까운 세월이다. 하지만 진정 일제강점에서 벗어났는지 돌이켜 보면 왠지 찜찜하다. 우리의 생활 속에, 우리의 언어 안에, 우리 내면에 아직도 일제 잔재가 널려 있어서 하는 말이다.

조정진 문화부장
어제 아침 신문사 편집회의에서 한 참석자가 “오늘은 이 기사를 야마로 하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일본어 ‘야마’가 ‘산’이라는 원래의 뜻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꼭대기’ ‘머리’로 쓰이는 걸로 봐선 ‘머리기사’를 의미하는 것 같다. 화가 치밀어오를 때도 툭하면 ‘야마’가 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이랴. 사회부 기자들은 요즘도 나와바리(구역)·사츠마와리(경찰서 출입기자) 같은 일본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다. 단독보도나 특종을 했을 땐 서슴없이 ‘도꼬다이’했다고 말한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걸까.

24년 전의 일이다. 88서울올림픽이 막 끝난 직후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첫 부서는 신문사 편집부. 우리 글로 마술을 부릴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한창 활자의 매력에 빠져 있던 문학청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기대는 채 두 달도 못 돼 산산조각이 났다. 졸업 후 봉사하던 시민단체와 자유기고가를 벗어나 처음으로 제대로 된 월급이 나오는 직장에서 입사하자마자 사표를 내야 했으니….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사수’로 불리던 선배가 새내기 기자인 내게 업무 지시를 내렸다. “요건 다대로 세우고, 요건 요꼬로 눕히래이!” 잉? 다대는 뭐고, 요꼬는 뭐지? 사수의 진한 경상도 사투리도 알아듣기 어려운 참에 낯선 단어에 한동안 어리둥절해하자 또 한마디 던진다. “뭐하노, 반항하는 기가?”

‘무조건 사수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부장의 엄명을 깨고 되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우리말로 말씀해 주세요?” 그게 화근이었다. ‘우리말’. 가시돋친 말이 다발로 날아왔다. ‘기본이 안 됐고’ ‘싸가지가 없고’ ‘사수에게 말대꾸하고’ ‘조직의 기강을 무시했고’ ‘기자로서 자격이 없고’ 등등. 이상한 놈(?)이 신문사에 들어와 아무것도 아닌 걸 갖고 평지풍파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아니, 해방된 지 40년도 더 지났는데 왜 아직까지 일본어를 쓰십니까. 더구나 지난 한글날엔 ‘국어순화’가 어떻고, ‘생활언어의 일제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제목을 뽑으며 핏대를 세우던 분이 어떻게 일본어로 지시를 합니까. 그것도 신문사에서…. 선배님한텐 더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대들었다. 끝내 사표까지 썼다.

그날 밤, 사수는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나는 요꼬·다대가 가로·세로보다 더 편하대이. 니가 이해해라” 하고 말했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얼마 후 청운의 꿈을 품고 입사했던 그 회사를 떠났다. 신문사 편집부에선 그때만 해도 미다시(표제어)·와쿠(틀)·시로삼각(하얀삼각)·쿠로다이아몬드(검은다아이몬드)·기리까에(교체) 등 그야말로 일본어가 난무했다. 일본어투성이인 편집용어를 몰라 깨지는 게 일상이었다.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때 그 사건이 눈에 선하다. 특히 오늘같이 광복절엔 더욱 생생하게 반추된다. 안타까운 건 당시나 지금이나 신문사를 비롯한 우리 사회가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점이다. 어디 신문사뿐이겠는가.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에 깊숙이 침투한 일제 잔재는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다.

‘건설현장의 데모도(허드레 일꾼)와 시다바리(보조원)들은 요즘도 우와기(저고리·상의)를 벗어던진 채 바케쓰(들통·양동이)에 물을 잇빠이(가득) 담아다 샷시(창틀)에 공구리(양회반죽)를 하고 시마이(끝냄)하면 하꼬방(판잣집)에서 새우잠을 잔다. 유도리(융통성) 없이 분빠이(분배·나눔)하다가는 와이로(뇌물)나 야미(뒷거래) 혐의로 인생 나가리(유찰)될 수도 있다. 자가용으로 영업을 하는 나라시 운전사들은 툭하면 빠꾸(후진)와 모도시(핸들복원)를 외친다.’

과연 대한민국은 일제로부터 완전 광복했는가. 당신은 생활 속에, 언어 안에, 내면에 아직도 친일 잔재를 품고 있지는 않은가. 제67회 광복절 아침에 묻고 싶다.

조정진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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