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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차맥] 〈41〉 고려의 선비 차인들 ③ 용헌 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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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7-16 20:15:16 수정 : 2012-07-16 20: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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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한 생활 속 두문동 茶정신을 고스란히 간직
이암의 손자로서 가문의 차생활 전통을 기록으로 남겨
매월당과 한재 정신도… 조선전기 청담차 징검다리 역할
어느 나라든 말기에 이르면 안에서부터 귀족이나 관리들의 부정부패나 사치향략으로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역사의 흥망이 있는 것이다. 전 왕조로부터 녹을 먹고 부귀와 영화를 누린 선비들이 왕조에 충성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반드시 그 가운데는 새로운 왕조와 정치세력을 꿈꾸는 혁명아들이 있다. 그래서 패는 두 패로 갈라진다. 평상시에도 권력 다툼이 있게 마련인데, 왕조의 말기 그것이 있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우리 역사에서 ‘두문동’만큼 왕조교체의 일로 선비들이 집단적으로 저항하여 신화가 된 일은 없다. 가야가 신라에 병합될 때는 가야 왕족과 신라 왕족의 혼인으로 인하여 크게 저항은 없었고, 백제의 계백장군과 낙화암, 고구려의 연개소문 형제들의 내분이 있었고, 통일신라가 망했을 때는 신라의 마지막 왕손 마의태자 이야기가 여러 가지로 각색되어 전한다.

이성계의 조선 창업을 두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찬반이 맞서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때 가장 어리석은 것은 새로운 창업을 욕하는 사람들이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한 나라가 망했는데 왜 망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가치가 있어도, 왜 한 나라를 흥업했느냐를 부정적으로 보는 일은 참으로 역사를 모르는 자들이다. 대체로 도덕론이나 정의론으로 논박하는 사람들은 역사를 나름대로 자신의 이유에 의해서 논단하는 사람들이다.

지나간 시간을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역사책들은 흔히 ‘동국통감(東國通鑑)’처럼 거울 ‘감(鑑)’자를 쓰는데 나라의 흥망을 나중에 찬반하는 일은 대체로 찬반하는 사람 자신의 현재의 정치적 입장이나 그것과 관련된 감정이나 회한을 드러내는 일에 불과한 일이 종종 있다. 말하자면 역사를 현재의 현실정치에 이용하는 것이다. 현실정치의 정치적 합리화를 도모하는 이데올로기인 경우가 많다.

새로운 정치세력에 합류하는 것은 나무랄 필요는 없어도, 망해 가는 구 왕조에 충성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역사는 앞으로도 흥망을 계속할 것이고, 이때 흥하는 나라도 언젠가는 망할 것이고, 비록 자신이 벼슬한 왕조는 구하지는 못했지만, 그 망함의 책임을 지고, 전 왕조에 마지막 충성을 한다고, 새 왕조의 벼슬의 유혹을 뿌리치는 일은 아름답다. 석양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용헌 이원의 차 전통은 그의 후손에 이어져 안동의 임청각과 군자정을 일구었다. 임청각이라는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왔다.
우리가 ‘두문동 72’인을 사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은둔의 미덕을 만들어낸 사람들. 새 권력의 벼슬을 마다한 은둔의 대명사들이 한국문화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그리고 한국의 차사에 남긴 흔적은 무엇일까. 흔히 한국사상사에서 간과되기 쉬운 인물들이 이들이다. 고려왕조는 망했지만 ‘두문동 정신’은 이상하게도 조선의 선비들에 이어져서 조선왕조에 들어서 정치적으로 정국(靖國)이 일어나거나 사화(士禍)가 일어날 때 스스로 낙향을 하거나 은둔을 할 때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다.

두문동 정신은 조선의 ‘사림(士林)’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고려는 망했지만 선비정신을 남긴 것이 고려이다. 두문동의 인맥 가운데 이암과 이색, 정몽주와 길재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두문동은 이렇게 목은(牧隱), 포은(圃隱), 야은(冶隱)의 삼은(三隱)을 낳았다. 이 밖에도 이들 삼은에 비해 덜 알려진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수은(樹隱) 김충한(金?漢) 등을 포함해서 여러 은(隱)자 돌림의 선비들이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그 후에도 특히 정몽주를 흠모하는 선비들 가운데 은(隱)자를 호에 넣은 경우가 많았다. 정몽주와 최영 장군은 왕조의 몰락과 함께 비운에 갔기에 정(情)이 많은 민족은 특히 그들을 문묘에서 배향하고 무신(巫神)으로 받들기도 한다. 흥하는 정치권력에 아부하기는 쉽지만 망하는 정치권력에 충성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두문동 정신은 조선 사림의 정신적 사표가 되었다. 이때 ‘청담(淸談)’의 정신은 차의 정신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아마도 식물 중에 차(茶)만큼 선비들과 어울리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차나무에 ‘풀의 성현(聖賢)’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

목은 이색(李穡)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목은에 비해 목은의 선생이었던 행촌(杏村) 이암(李?)은 덜 알려져 있다. 이암의 손자인 용헌(容軒) 이원(李原·1368∼1429)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고려에서 병조정랑을 역임하고, 조선에서 승지를 거치면서 탄탄대로의 벼슬길에 오른다.

역사는 ‘흘러가는(歷)’ 것이고 ‘흘러간’ 것이다. 가문의 내력이나 정서로 봤을 때는 고려에 충성해야 하지만 그 후손들이야 새 시대에 맞추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중국 사신으로 다녀와서 승승장구하여 관찰사, 대사헌, 예조판서, 그리고 좌명공신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진다.

이암-포은의 두문동의 차 정신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는 아름다운 차 생활과 함께 여러 편의 차시도 남겼다. 이원의 차시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드물게 이암 가문의 차 생활 전통을 기록으로 전해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남긴 시들은 아마도 그가 ‘큰 벼슬을 하기 전의 시(詩)’들이거나 아니면 ‘벼슬에서 물러난 뒤의 시’들인 것 같다.

“맑은 새벽에 세수하고 머리 빗고 오사(烏紗)를 쓰고/ 달팽이 굴같이 작은 초옥에 앉았다네./ 술 거르는 조상(槽床)에는 술방울이 비처럼 떨어지고/ 뜰의 나무에는 눈발이 꽃처럼 나부끼네./ 밝은 창 앞에서 먹을 적셔 시를 쓰고/ 얼음 깨고 샘물 길어 손수 차를 달이네./ 손님이 오면 퉁명스럽게 돌아 문을 거니/ 근년에는 너무 게을러 말 안 하기를 좋아한다네.”(‘幽居卽事’)

은자의 풍모가 빼어나는 그의 대표적인 차시이다. 여기에 아마도 할아버지 이암의 차정신이 녹아 있을 것이다.

“삭풍은 세차서 얇은 옷을 날릴 것 같고/ 벼슬길 꼬깃꼬깃 달팽이 싸움이라네./ 나의 인생은 실에 물들듯이 슬프고/ 그대의 시는 꿈에 붓이 꽃을 피우는 것이라네./ 몸이 아파서 두릉의 기장으로 술 담그고/ 잠에서 깨면 간이(諫議)가 보내준 차를 달인다네./ 쌓인 눈은 뜰에 가득하고 인적은 드물고/ 어린아이 밥 달라고 칭얼거린다네.”(‘呈春亭’)

청빈한 선비의 차 생활이 눈에 잡히는 듯하다. 선비의 인생은 시대에 따라 물들 수밖에 없고, 그래도 시는 꿈을 꿀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밥 달라고 칭얼댈 정도이니 그 가난을 짐작할 수 있다.

“찬 이슬에 나뭇잎 날려 처량하고/ 부용꽃 지고 나니 국화 향기 새롭네./ 때로는 청강 구비에 낚시 드리우고/ 강 언덕을 바라보면 자욱한 갈꽃 서리 같네./ 저무는 해 찬바람에 술값 더해지니/ 다시 풍로를 향해 손수 차를 달이네./ 아이들은 가지 끝에 눈을 잘못 알고/ 벌써 뜰에 매화가 피었다고 알려주네.”(‘次四佳亭詩’)

청빈한 생활 속에 선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낚시와 차 생활이다. 술값은 부담이 된다. 그래서 가난할수록 술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고 차와 친숙하게 됨을 알 수 있다.

“깊은 산 한 줄기 길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홀로 찾아왔네./ 산간벽지라 인적은 드물고/ 봉우리는 높아 해가 빨리 진다네./ 폭포수는 돌부리를 어지럽게 울리고/ 성긴 숲에서 들려오는 풍경소리 차디차다네./ 고요한 속에서 세속의 일 다 잊고/ 차 달이며 달과 마주 앉아 시를 읊는다네.(‘宿觀音寺’)

그의 차시는 점점 깊이를 더해간다. 깊은 산골에 있는 관음사라는 절을 찾아 하루 묵으면서 시를 쓴 것 같다. 동양의 공통적인 정서인 ‘달을 사랑하는 선비’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술과 달이 아니라 차와 달을 노래하고 있다.

“봄을 맞은 산(春山)에서 적적히 지내며/ 소요하는 맛이란 그 뜻이 깊다네./ 새벽에는 숲을 뒤져 약초를 캐고/ 저녁에는 대나무 불로 차를 달인다네./ 지루한 날엔 깊은 새소리를 즐기고/ 가벼운 바람은 꽃잎을 날리네./ 그대여, 자주 오가면서/ 함께 차 마시며 시나 읊어보세.”(‘贈虛上人’)

상인(上人)은 선승(禪僧)을 말한다. ‘허(許)상인’이라는 선승과 교분이 상당하였던 것 같다. 당시 차를 좋아하는 선비들은 하나같이 선승과의 교류를 즐겼다. 이러한 전통은 나중에 매월당에게로 이어지고 다산에까지 이어진다.

한국의 차 생활은 절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을 알 수 있다. 절에서는 한가하게 차를 재배할 수도 있고, 또 참선에 도움을 주는 식물이니 애용할 것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승려들은 선비들에게 차를 선물한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선비 가운데 차의 고수들은 선승을 좋은 벗으로 대했던 것 같다. 승려와 선비들의 차 교류의 전통은 이미 여말선초부터 서서히 정립되어 갔던 듯하다.

“내 생활신조는 본래 담박함을 따르는 것이지만/ 화려하고 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세속에 산다네./ 기회를 노리는 망령된 마음은 이미 사라졌고/ 허기져서 곤히 잠들며 오로지 유유자적한다네./ 달빛 아래 도인(道人)은 문을 두드리고/ 소나무 그늘 탑상에서 시우들과 마주한다네./ 벗들과 차 마시다 보면 갑자기 돌아갈 것을 잊고/ 선방의 방장처럼 허백(虛白)을 잡고 있네.”(‘又次明正庵詩’)

드디어 속세에 있지만 선방에 있는 선승이나 다름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상 6편의 용헌 이원의 시를 읽고 있으면 마치 속인이 도를 터득해 가는 과정을 한 단계씩 밟아 들어가는 것 같다. 마치 ‘차(茶)의 심우도(尋牛圖)’를 보는 것 같다. 마지막 시에는 ‘허백(虛白)’을 논하고 있다. ‘허백’은 한재(寒齋) 이목(李穆·1471∼1498)의 ‘허실생백부(虛室生白賦)’의 준말이다. 이원은 선가(仙家)의 후손으로서 유가와 도가(道家)를 병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허실생백(虛室生白)은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구절로서 공자와 수제자 안회 사이의 문답을 통해 유가를 풍자한 대목이다. “저 빈 곳을 보면 마음(虛室)이 저절로 환해지니 길상이 머물고 머문다(瞻彼?者 虛室生白 吉祥止止)”는 뜻이다.

여기서는 다분히 절의 방장을 은유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불가적 해석의 허백이겠지만, 도불(道佛)이 또한 하나이고 보면 뜻은 마찬가지이다.

매월당과 한재의 청담의 차 정신이 용헌 이원에게도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두문동 차는 조선 전기의 청담차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여말선초의 혼란기를 살다간 그였기에 마음이 혼란스러우면 으레 시와 차에 매달렸던 것 같다. 차를 달이면서 동시에 시를 짓는 ‘끽다시부심시구(喫茶時復尋詩句)’의 생활이 습관처럼 몸에 밴 듯하다. 그야말로 다시일미(茶詩一味)를 실천한 선구자이다.

안동에는 임청각, 군자정 이외에도 탁청정이 있다. 광산김씨 예안 오천(烏川) 입항조인 김효로(金孝盧)의 둘째아들 탁청 김유(金瀏·1491∼1552)가 지은 정자이다.
용헌 이원의 차 전통은 이어져 그의 후손에 이르러 안동에 임청각(臨淸閣), 군자정(君子亭·별당형 정자)을 짓게 된다. 이 건물은 조선조 민가로서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임란왜란 전)로 군자정은 ‘차를 마시던 정자’로 알려져 있다. 이원의 여섯째 아들인 영산현감 이증(李增·1419∼1480)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입향조가 되었고, 이증의 셋째 아들 이명(李?)이 1519년에 99칸의 큰 살림집과 정자를 지었다.

이증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안동으로 내려왔다. 이증의 행보는 매월당 김시습의 행보와 같다. 이는 역시 두문동 정신이 우리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짐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증은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뛰어나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러나 아들 이굉(李?)·이명(李?)과 손자 이윤(李胤)·이주(李胄)·이려(李?) 등 한 집안에 5명이 연산조 때 사화에 연루되어 이 중에서 이주는 죽고 나머지는 귀양 갔다.

중종반정으로 풀려난 이들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굉은 낙동강변에 귀래정을 짓고, 이명은 법흥동 낙동강변에 임청각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살았다. 임청각은 또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李相龍)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단군으로부터 흘러내려 오는 민족의 선맥(仙脈)과 유불선(儒佛仙) 삼교지도(三敎之道)의 맥이 살아 있음이 확실하다.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귀거래사 구절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에서 ‘임(臨)자’와 ‘청(淸)자’를 취한 것이다. 귀거래사에서 당호를 따오는 것만 보아도 선가의 차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두문동의 선가(仙家)의 차 정신과 민족혼은 조선으로 이어져 더욱 커졌다. 선가와 유가가 융합된 ‘선유(仙儒)의 차 정신’이 바로 풍류차·청담차·선비차이다.

두문동 선비인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1347∼1392)도 주옥 같은 시 11편을 남겼다. 도은은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한다.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실록을 편수하는 등 두문동의 핵심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친구들 오랜만에 직접 만나니/ 마음과 몸이 의기투합하네./ 삼업(三業)은 모두 물처럼 깨끗해지고/ 일생은 구름같이 한가하다./ 샘은 차 달이기에 알맞고/ 해는 길어 산을 구경하기 좋아라./ 영(靈) 스님에게 한 말이 부끄러워/ 벼슬 버리고 다시 산사로 오고파라.”(‘남악총선사의 방에 적다’)

“섣달그믐밤 산사를 찾았더니/ 스님이 심지 자르며 밤을 지키네./ 차 달이니 주전자에서는 지렁이 우는 소리/ 시를 적으니 먹물은 까마귀 날개 치는 듯하네./ 새벽을 알리는 북소리 세 번 치니./ 하늘엔 북두칠성이 비스듬히 걸렸네./ 내일 아침이면 한 해가 새로 바뀌니/ 떠돌이로 살아온 생의 의미는 가이없어라.”(‘섣달그믐밤 옛사람의 운자를 써서’)

선비 차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차시를 발굴해 온 류건집 박사는 “이 밖에도 백문절(白文節)은 화엄사에서 ‘부들방석에 찻잔 놓고 얘기하며 소일하네’, 남양부원군 홍규(洪奎)는 ‘찻사발은 깊은 것을 쓰지 않네’, 오천군(吳川君) 정사도(鄭思道)는 고주사(高住寺)에서 ‘자리에 둘러앉아 차 끓여 마시며 청담을 나누네’라고 했고, 정추(鄭樞)는 ‘눈물(雪水)로 차를 끓여 마시기도 했다”고 말한다.

고려의 선비차인들은 생각보다 훨씬 고수의 차 마니아였음을 알 수 있다. 흔히 한국의 차사는 단절되어 있다고 쉽게 단정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특히 두문동 선비들은 고려와 조선을 잇는 차 마니아였음을 알 수 있다. 청담의 차 정신은 이때 이미 형성되어 조선에 들어가서 도도한 ‘차의 유유한 강물’을 형성한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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