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오래 묵을수록 좋은 것 네 가지를 ‘오래 말린 땔나무, 오래 묵어 농익은 포도주, 믿을 수 있는 옛친구, 읽을 만한 원로작가의 글’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시승기를 쓰면서 다소 황당한 비교가 될 수 있겠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경기도 포천까지 달려 본 쌍용자동차의 렉스턴 W는 바로 ‘믿을 수 있는 옛친구’ 같은 느낌을 전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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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용자동차가 6월 선보인 2012년형 렉스턴 W. /사진=이다일 기자 |
이날 시승하는 차는 쌍용차가 되살려낸 2012년형 렉스턴 W다. 디자인은 10년 가까이 큰 변화를 겪지 않았고 엔진의 사양도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느낀 차는 예전의 렉스턴과 많이 달라졌다.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디자인은 테일 램프 곡선의 작은 삐침까지 달라졌다. 그릴은 3선으로 간결해졌고 전체적인 틀은 유지하고 있지만 안정된 모습으로 변했다. 처음에 말했던 오래된 친구 같은 느낌이다. 10년 만에 만났지만 낯설지 않은 느낌 말이다.
속을 살펴보니 10년의 연륜이 그대로 보인다. 같은 생산라인에서 10년 동안 같은 차를 만들지는 않았다. 조금씩 개선했고 변화했다. 새로운 2.0ℓ 디젤 엔진은 155마력의 출력을 낸다. 또 평소에 많이 사용하는 3000rpm 미만의 엔진 회전에서 최대 토크 36.7㎏·m의 출력을 낸다. 동급 SUV 가운데에도 빼어난 성적이다. 공차중량 1905㎏으로 2톤에 가까운 차체를 2.0ℓ의 엔진으로 움직인다. 좋게 말하면 부드럽고 평가절하한다면 튀어나가는 맛이 없다. 하지만, 쌍용차는 단점을 장점으로 바꿨다. 부드러운 엔진의 특성을 살려 묵직한 차체를 더욱 조용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소음과 진동을 뜻하는 NVH에 신경을 썼다. SUV의 특성상 고속 주행에서는 풍절음이 들리지만 시내 주행을 비롯한 평소의 달리기에선 무척 조용하다. 높은 차고에서 오는 넓은 시야는 쾌적함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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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렉스턴 특유의 대형 스티어링휠이 그대로 이어졌다. /사진=이다일 기자 |
쌍용차는 렉스턴에 W를 붙이면서 새로운 전자장비의 채택도 잊지 않았다. 센터 콘솔에는 내비게이션이 내장된 오디오가 장착됐고 스마트키를 이용해 버튼시동도 가능하다. 다소 옛날 디자인이긴 하지만 넓고 큰 스티어링휠은 오프로드에서 빛을 발한다. LED를 사용한 턴 시그널 램프도 등장했다. 또 브리지스톤의 고급 타이어를 장착했다. 시승차가 렉스턴 W의 최고급 모델인 이유도 있지만 그래봐야 가격은 3633만원이다. 대한민국 1%를 겨냥하며 최고가 SUV의 역사를 만들었던 쌍용차 렉스턴인데 말이다.
쌍용차의 최근 전략은 참으로 절박하다. 그래서 가장 완성도 높은 제품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몇 해 전 대량 해고사태와 파업으로 노사 모두 큰 고통을 겪었다. 물론 고통은 진행중이다. 생산 라인을 바꾸지 못해 10년 전 만든 그 라인을 그대로 쓴다. 그래도 신차를 내놓으며 온갖 정성을 다 들였다. 할 수 있는 만큼 모든 걸 했다고 봐도 좋겠다. 타이어와 내비게이션, 오디오를 비롯한 이른바 ‘장착’으로 개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개선했다. 10년간 이어진 차체에 개선한 엔진도 얹었다. 유로5를 만족시켜 친환경차에 들어간다. 상품성은 좋아지고 든든한 차체는 그대로다. 쌍용차가 최근 약진을 거듭하는 이유다. 최신형 SUV가 줄지어 나오고 유행에 맞춰 만든 차가 인기를 끌지만 오래도록 만들며 꼼꼼하게 개선하고 튜닝한 렉스턴 W에는 유행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있다. 레저와 캠핑을 비롯한 아웃도어 활동이 들불처럼 번지며 단단한 프레임 차체의 SUV가 그리워지는 요즘에는 더욱 필요한 무엇인가가 말이다.
이다일 기자 aut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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