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여년 조상때부터 이어진 농지
개발열풍 불어도 한 눈 안팔아 ‘금싸라기 땅’으로 불리는 서울 강남에서 농사를 짓는 부부가 있다. 2만여㎡ 땅에 각종 채소를 기르던 이 부부는 20여년 전 변화를 택했다. 직접 농사를 짓는 대신 도시 사람들에게 텃밭을 분양하기로 한 것. 최근 열풍처럼 불고 있는 도시농업의 출발이었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도시농업을 시작한 부부는 농장 운영뿐 아니라 회원들과 농촌 마을을 연결해주는 가교 역할도 하고 있다. 또 농장에서 나온 농작물로 불우이웃에게 김장김치를 만들어 주는 등 10년 넘게 봉사활동도 이어오고 있다.
서울 서초구 원지동 대원주말농장을 운영하는 김대원(59)·최성희(56) 부부가 그 주인공. 지난달 29일 오후 농장에서 만난 부부는 영락없는 농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농사를 짓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마지막 서울 농부’, ‘도시농업 전도사’로 불리는 이 부부를 만나 서울에서 농부로 살아가는 법을 들어봤다.

김씨는 1750년 10대 조상이 자리를 잡은 고향인 원지동을 떠나본 적이 없다. 서울이 개발 열풍에 휩싸여도, 주변에 보금자리 주택과 추모공원이 생기며 땅값이 올라도 부부는 한결같이 농사를 고집했다. 대를 이어온 농부의 삶이 이 부부에겐 더없이 행복했다. ‘떠날 생각이 안 들었나’는 질문에 “서울에 제대로 된 농부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김씨 부부는 서초구청으로부터 ‘서울 농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또 남편 김씨는 1986년 33살의 나이에 지역 농업을 이끌 재목으로 뽑혀 국민포장을 받았다. 부창부수랄까. 부인 최씨도 2008년 산업포장을 받았다.
2002년부터 6년간 ㈔농가주부모임전국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며, 도시와 농촌을 연결한 최씨는 농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받았다. 당시 농가주부회 회장을 서울에 사는 ‘무늬만 농부’에게 맡길 수 없다는 반대도 많았지만, 최씨는 “농촌에서 생산하는 농산물을 소비하는 건 도시 사람들이다. 도시 사람들을 알아야 농촌이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호소해 회장직에 당선됐다. 최씨가 회장직을 맡는 동안 2만5000명이던 회원 수는 2008년 퇴임 당시 6만500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서울에서 농사를 짓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대로 내려오던 2만3000여㎡(약 7000평) 땅에 채소도 키워보고, 특용작물과 꽃도 재배해봤다. 하지만 넓지 않은 땅에서 생산되는 농작물로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란 쉽지 않았다.
농사를 포기할 수는 없었지만, 생계는 어려웠다. 고민 끝에 묘수가 떠올랐다. 부부는 자신이 농사를 짓는 땅이 ‘서울’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즈음 건강이 불편한 지인에게 약간의 땅을 떼어주며 요양을 겸해 농사를 지어보라고 권한 것이 계기가 됐다. 최근 열풍처럼 불고 있는 주말농장의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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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김대원·최성희 부부가 서울 서초구 원지동 대원농장에서 오붓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
1989년 시작한 주말농장은 3개 구좌(농사지을 땅을 빌려주는 단위)로 출발했다. 당시에는 주말농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때였다.
“당시에는 주말농장이니, 도시농업이니 하는 말도 없었어요. 그냥 우리끼리 서울 외곽에서 농사를 짓는 거니까 ‘도시 근교 농업’이라고 불렀죠. 3개 구좌 회원들이 수확한 상추, 깻잎을 따서 함께 농장 한 편에서 나눠먹으면서 가족처럼 지냈죠.”(김대원씨)
그렇게 주말농장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구좌 수는 해마다 늘어났고, 부부가 짓는 땅보다 분양하는 땅이 더 많아졌다. 그러다 1992년 서울시농업기술센터로부터 ‘시민텃밭농사’ 시범사업 참여를 제안받고 ‘대원농장’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주말농장 사업을 시작했다.
부부는 현재 1500구좌의 텃밭을 분양하고 있다. 1구좌당 9.9㎡(3평)로, 연회비 13만원을 내면 각종 모종과 농기구를 사용할 수 있다. 주말에는 500여명이 몰려 농장 주변이 주차장으로 변할 정도다. 매년 대원농장 회원이 되려고 대기하는 인원만 100명이 넘는다.
“주말농장이지만 농사일은 누구보다 엄격하게 관리해요. 1주일에 한 번 이상은 농장을 찾아야 하고, 이를 어기면 누적 횟수에 따라 다음 계약에서 제외하죠. 농사에 게으른 회원은 봐주지 않는 게 원칙이에요. 그래도 대부분의 회원들이 잘 따라주셔서 10년 넘게 회원으로 등록하고 있는 사람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아요.”(최성희씨)
부부는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기 위해 고민한다. 최근엔 농장에서 나오는 농작물을 직판장에서 판매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최근 도시농업이 열풍처럼 번지면서 부부는 더욱 바빠졌다. 새로 텃밭을 만드는 초등학교에 가서 도움을 주기도 하고, 지자체의 도시농업 사업에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20여년 전 부부가 처음 주말농장을 시작할 때와 비교해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다.
“도시농업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돼요. 이렇게 열풍처럼 불었다가 어느 순간 사그라질지도 모르니까요. 단순히 텃밭을 가꾸는 데 그치지 않고 농촌, 농민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 더 중요하죠.”(김대원씨)

1992년 농업기술센터와 함께 주말농장 시범사업을 시작할 당시 몇몇 농가도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는 건 대원농장이 유일하다. 부부는 그 이유로 “커뮤니티를 통한 공동체 형성”이라고 말했다.
“농장을 찾는 사람들은 옛 농촌의 정을 생각하고 오는 경우가 많아요. 마을회관에 모여 농작물을 나눠 먹듯이, 직접 가꾼 채소들로 가든 파티도 하고 품평회도 열어서 회원들 간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데 주력했죠. 이제는 회원들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이웃처럼 지내시더라고요.”(최성희씨)
부부는 도시농업의 또 다른 장점으로 도시와 농촌 간의 유대감 형성이라고 말한다. 최근 기록적인 가뭄이 이어지면서 농장을 찾는 회원들은 하나같이 농촌을 걱정한다. 김씨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작게나마 농사일을 하면서 농촌의 어려움을 알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부부는 또 농장 회원들과 농촌 마을을 연결해 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농가주부회 회장을 지낸 최씨의 인맥으로 전국 각 농촌마을로 체험활동을 다니며 회원들에게는 무공해 농산물을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기회를, 농가에는 소득 증대의 기회를 제공한다.
부부는 이 같은 커뮤니티 활동을 봉사활동으로 이어가고 있다. 부부는 서초구청과 함께 14년째 소년소녀 가장과 홀몸노인들에게 된장·간장을 담가 주는 행사를 해오고 있다. 또 농장에서 나오는 농작물로 김장김치를 담가 장애인 단체에 전달하고 있다.
“저희 농장 텃밭 수가 1500개인데, 회원들이 배추 한 포기씩만 기부해도 1500포기가 모이는 셈이죠. 다들 좋은 일에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기꺼이 나눠줄 뿐 아니라 직접 김치 담그기에 참여하는 사람도 많아요.”
김씨는 도시농업은 최근 주목받고 있는 귀농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주말농장은 귀농의 모델하우스”라며 “작게나마 스스로 농사를 지어보면서 자신이 농촌 생활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안용성 기자 ysah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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