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연령층에서 더 심각
세계일보 취재팀은 그동안 심층기획 ‘우리 안의 폭력’ 1부 ‘한국사회 폭력 대해부’ 시리즈를 통해 가정과 학교, 군대와 직장은 물론 구성원 간 소통이 부족한 조직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폭력 양태를 살펴보고 폭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심층 보도했다. 2부에서는 ‘곳곳에 박혀 있는 ‘야만의 그림자’’를 통해 개인의 일상 속에 숨어 있는 폭력의 실태를 들춰볼 계획이다. 2부 첫회 주제로 ‘사이버 폭력’을 선택했다. 사이버 세계에서는 글자와 부호, 사진 같은 모습으로 형태를 바꾼 폭력이 행사되고 있었다.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양측 모두 이를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이버 폭력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일상 깊이 파고들어 똬리를 틀고 있었다.
“○○○ 뭐야, 싸가지 없어”, “○○○는 장애인이라 나대는 거야”, “별명은 코딱지 맨, 썩은 물체이고 우리 학교 국민 왕따.” 인터넷 왕따 카페(사진)에 올라온 글들이다. 피해자의 실명과 학교를 그대로 노출하고 때로는 사진까지 올려놨다. 현실의 왕따 수법을 그대로 사이버상에 응용했다. 15일 세계일보 취재팀이 왕따 카페의 실체를 추적해보니, 일부 또래 집단이 인터넷상으로 여론을 형성한 뒤 학급 내 왕따를 끌어가는 ‘한국형 사이버불링’(cyber bullying·사이버상의 괴롭힘)이 광범하게 확산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일부 주동세력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희생양을 양쪽에서 괴롭힌다는 점에서 인터넷이나 모바일 기기 등 온라인 공격에만 그치는 외국과는 확연히 차별됐다.

“죽고 싶었어요.” 이○○양(14)은 심리상담사에게 악몽 같던 6개월을 그렇게 털어놨다. 전라남도 시골의 한 중학교 1학년이던 이양은 지난해 8월부터 따돌림을 받기 시작했다. 약간 투박하고, 거친 이양의 말투와 행동을 못마땅하게 보던 몇몇 학생들이 2학기가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이양을 괴롭혔다. 급식대에 선 이양을 밀치고 “왜 쳐다보느냐”며 겁을 주기도 하고, 이양과 친한 친구들도 떼어놓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멀어졌다. 결국 이양은 같은 반 친구 38명이 모두 따돌리는 외톨이 신세가 됐다.
담임교사가 눈치를 채고 학생들을 타일렀지만 더 큰 부작용이 발생했다. 반 친구들이 ‘인터넷’으로 활동지를 옮긴 것. 왕따 여론을 인터넷에서 만드는 전형적인 한국형 사이버불링의 수법이었다. 주동자 중 하나가 ‘이○○ 안티카페’를 만들고 여기서 이양의 행동 하나하나를 시시콜콜 떠들어댔다.
차츰 가입자가 불어나면서 회원이 10여명에 달했다. 학교에서는 괴롭힘이 사라진 척하면서 인터넷에서는 킬킬댔다. “친한 척해줬더니 헤헤 웃는다”, “이○○ 또 나대기 시작한다.” 인터넷상의 분위기가 학급 분위기로 그대로 이어졌다. 혹 심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도 있었으나, 인터넷을 통해 만들어진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학급 친구들은 때로 “함께 공부를 하자”며 이양을 아무도 없는 집에 불러 허탕치게 하기도 했다. 이양에 대한 괴롭힘은 경찰이 ‘왕따카페’를 잡아내고서야 그쳤다. 학생들은 왜 이양을 괴롭혔냐는 물음에 “이○○의 말과 행동이 그저 싫었다”고 털어놓아 모두를 허탈하게 했다. 광주지방경찰청 문귀희 경위는 “온라인에서 이양을 따돌리는 분위기를 만들다 보니 다들 죄의식이 없었다”고 말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체 사이버 범죄 중 개인정보 공개, 모욕, 협박 등의 사이버불링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9년을 제외하고 지난 5년간 계속 10%를 웃돌았다. 한국인터넷진흥원이 지난해 말 사이버폭력 실태를 조사한 결과에서도 국내 인터넷 사용자의 절반가량(49.2%)이 인신공격과 욕설, 스토킹 등 각종 사이버상의 폭력을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나이대가 낮아질수록 폭력경험이 높아 10대의 76.0%, 20대의 58.2%, 30대의 40.3%가 사이버폭력 가해 경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인터넷은 시공간의 제약이 없고, 게시물을 익명으로 올리면 누가 괴롭히는지도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등 간편하게 괴롭힐 수 있는 탓에 사이버 폭력이 근절되지 않는 것이다.
수법도 지능화하고 있다. 고교생의 경우, 왕따 카페를 평범한 친목카페나 학급카페로 위장하고 있다. ‘왕따’ ‘찐따’ 등을 키워드로 검색해 카페를 폐쇄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서울대 교육학과 김동일 교수는 “우리나라는 외국과 달리 사이버불링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든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면서 “온라인상의 행동으로 타인이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현준 기자 hjunpar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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