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구나
촉으로 가는 길에 대한 나의 가장 빠른 기억은 김소월의 시와 관계가 있다. 김소월의 시 ‘접동새’에 등장하는 접동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름이 있어서 중학생인 나를 골치 아프게 했다. 그런데 그 많은 이름 중 소쩍새와 접동새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촉(蜀) 지방과 관계가 있었다. 두견(杜鵑), 두백(杜魄), 두우(杜宇), 두혼(杜魂), 망제혼(望帝魂) 등의 이름은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해서 전하는,
망제(望帝)라는 제호(帝號)를 가진 촉나라의 두우(杜宇)란 왕과 관계가 있었고, 불여귀(不如歸), 귀촉도(歸蜀道), 촉백(蜀魄), 촉혼(蜀魂), 촉조(蜀鳥)라는 이름은 ‘촉’이란 지방과 관계가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촉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해서 ‘귀촉도’란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불여귀’란 말은 ‘되돌아감만 같지 못하다’는 뜻인데 촉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험하다는 이야기인가?
망제(望帝)라는 제호(帝號)를 가진 촉나라의 두우(杜宇)란 왕과 관계가 있었고, 불여귀(不如歸), 귀촉도(歸蜀道), 촉백(蜀魄), 촉혼(蜀魂), 촉조(蜀鳥)라는 이름은 ‘촉’이란 지방과 관계가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촉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해서 ‘귀촉도’란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불여귀’란 말은 ‘되돌아감만 같지 못하다’는 뜻인데 촉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험하다는 이야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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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도(棧道). 절벽에 홈을 파서 통나무를 박아 만든 사다리를 눕혀 놓은 모양의 길. |

그래서 1993년 초 구정이 지난 지 닷새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나는 촉도를 보기 위해 용기있게 떠났다. 나는 그때 창춘(長春)에 살고 있었고, 구정을 지내기 위해 잠시 귀국한 처지였다. 돌아가는 경로를 먼저 다리(大理)와 리장(麗江) 지역을 돌아 청두(成都)로 가고, 다음에 청두에서 광위안(廣元)으로 가서 남쪽 촉도를 본 후 창춘으로 귀환하는 방식으로 짰다. 전시의 피난열차를 방불케하는 구정 전후의 교통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동쪽은 평원이고 서쪽은 산악지역이다. 이런 지형에서 남과 북을 가르는 기준은 동쪽의 경우 화이하(淮河)이고, 서쪽의 경우 친링산맥(秦嶺山脈)이다. 그런데 촉 지방은 친링산맥이 바로 밑 지역이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다바산맥(大巴山脈) 아래 지역을 가리킨다. 친링산맥과 다바산맥 사이에는 한중(漢中)지역이라 부르는 분지가 형성되어 있고, 다바산맥 아래에 있는 쓰촨(四川)분지를 촉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 때문에 촉도는 북쪽 촉도와 남쪽 촉도로 나누어진다. 장안(長安, 현재의 西安)이 자리 잡고 있는 관중(關中)지방에서 친링산맥을 넘어 한중지방으로 가는 산길을 북쪽 촉도라 부르고 한중지역에서 다바산맥을 넘어 쓰촨지방으로 가는 길을 남쪽 촉도라 부르는 것이다. 나는 두 차례에 걸쳐 촉도를 찾았는데 첫 번째는 남쪽 촉도에서 가장 유명한 자링강(嘉陵江)의 금우도(金牛道)를 보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북쪽 촉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포사도(褒斜道)를 보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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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문관(劍門關). 쓰촨 검문산 최고봉인 대검산에 있는 군사요새. |
산의 정상에 있는 검문관 남쪽으로는 거대한 바위가 갈라져서 만들어진, 버스 1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절벽 사이의 길이 200여m 가량 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이백이 “검각의 봉우리들은 가파르고 뾰족해서,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사람도 뚫지 못하네(劍閣?嶸而崔嵬, 一夫當關, 萬夫莫開)”라고 말한 구절은 바로 이 같은 길의 모양을 두고 읊은 것이었다. 나는 이 바위 절벽 사이의 촉도를 걸으며 강유(姜維)가 3만의 대군으로 이곳을 지키던 장면과 위나라의 명장 등애(鄧艾)가 음평(陰平)의 산길로 우회하여 촉을 멸망시키던 장면을 떠올리고는 안타까움보다는 제갈량이란 거인이 사라진 후의 공허함을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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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링강(嘉陵江). 쓰촨성을 흐르는 양쯔강(揚子江)의 제3대 지류. 명월협은 자링강의 상류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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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위안잔도(廣元棧道)-명월협(明月峽). 쓰촨과 산시(陝西)를 잇는 교통의 요지인 광위안 북쪽에 있는 명월협에 세운 고잔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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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백나무 숲. 역도(驛道) 주변에 심은 측백나무가 긴 세월이 지나 무성한 측백나무 숲이 되었다. 둘레 2미터 이상 된 나무는 진나라 때 심은 것이다. |
교역의 길이기도 한 잔도를 통해 오간 상품 중 잊을 수 없는 과일은 리즈(?枝)이다. 나는 이 과일의 맛에 매료되어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열심히 과일가게를 들락거렸다. 또 그 때문에 이 과일과 관련된 양귀비의 이야기를 부지런히 찾아서 읽었다. 당나라 때 이조(李肇)라는 사람은 ‘당국사보(唐國史補)’라는 책에서 “양귀비는 촉 지방에서 태어나서 리즈를 무척 좋아했다. 남해에서 나는 리즈가 촉지방에서 나는 리즈보다 훨씬 맛이 있어서 매년 날 듯이 말을 달려 남해의 것을 운반해 와서 진상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시인 백거이는 리즈에 대해 “하루가 지나면 색이 변하고, 이틀이 지나면 향이 변하고, 사흘이 지나면 맛이 변하고, 나흘이 지나면 색과 향이 다한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당나라 시절에 수천 ㎞나 떨어진 광동지방의 리즈를 어떻게 맛이 변하기 전에 장안까지 운송할 수 있었을까?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두목(杜牧)은 당 현종과 양귀비의 호사한 생활을 비판하면서 “흙먼지 일으키는 한 필의 말에 양귀비는 웃으나/ 이 사람이 리즈를 가져오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 없네(一騎紅塵妃子笑, 無人知是?枝來)”라고 읊고 있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의 양귀비전(楊貴妃傳)에서는 “현종이 기병을 보내 수천리 길을 달려 신선한 리즈의 맛이 변하기 전에 장안까지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건대 그리고 금우도의 바로 왼쪽에 있는 잔도의 명칭이 리즈도(?枝道)인 것으로 미루어 촉지방의 낙주(洛州, 현재의 ?陵)와 가주(嘉州, 현재의 樂山)에서 나온 리즈를 기병을 동원하여 장안으로 운송했을 것이다. 아마도 남해의 리즈보다 촉의 리즈가 더욱 분주히 잔도를 지나 장안으로 갔을 것이다. 나는 포사도 위에서 사흘 안에 장안으로 리즈를 전달하기 위해 밤낮으로 아슬아슬한 잔도 위를 달리는 기병의 모습을 상상하며 아득해졌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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