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홍정선의 중국 기행 ‘시간의 풍경을 찾아서’] ⑫ 촉으로 가는 길

관련이슈 홍정선의 중국 기행

입력 : 2012-05-02 17:42:40 수정 : 2012-05-02 17:42:40

인쇄 메일 url 공유 - +

높고도… 험하고도… 아득한 길…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구나
촉으로 가는 길에 대한 나의 가장 빠른 기억은 김소월의 시와 관계가 있다.  김소월의 시 ‘접동새’에 등장하는 접동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름이 있어서 중학생인 나를 골치 아프게 했다.  그런데 그 많은 이름 중 소쩍새와 접동새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촉(蜀) 지방과 관계가 있었다.  두견(杜鵑), 두백(杜魄), 두우(杜宇), 두혼(杜魂), 망제혼(望帝魂) 등의 이름은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해서 전하는,
망제(望帝)라는 제호(帝號)를 가진 촉나라의 두우(杜宇)란 왕과 관계가 있었고,  불여귀(不如歸), 귀촉도(歸蜀道), 촉백(蜀魄), 촉혼(蜀魂), 촉조(蜀鳥)라는 이름은 ‘촉’이란 지방과 관계가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촉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해서 ‘귀촉도’란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불여귀’란 말은 ‘되돌아감만 같지 못하다’는 뜻인데 촉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험하다는 이야기인가?

잔도(棧道). 절벽에 홈을 파서 통나무를 박아 만든 사다리를 눕혀 놓은 모양의 길.
이후에 알게 된 “눈물 아롱아롱 서역 삼만리”라는 구절로 유명한 서정주의 ‘귀촉도’란 시는 촉으로 가는 길에 대한 신비함을 더하고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촉으로 가는 길은 죽어서 혼백이나 갈 수 있을 정도로 험하고 아득한 길이란 말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백의 시가 등장했다. “아아, 높고도 험하여라! / 촉으로 가는 길은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구나(噫?? 危乎高哉! 蜀道之難, 難於上靑天)”라는 구절은 촉으로 가는 길에 대한 모든 설명을 넘어서는 표현이었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나는 반드시 촉도(蜀道)에 가보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백의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구나”라는 표현은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1993년 초 구정이 지난 지 닷새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나는 촉도를 보기 위해 용기있게 떠났다. 나는 그때 창춘(長春)에 살고 있었고, 구정을 지내기 위해 잠시 귀국한 처지였다. 돌아가는 경로를 먼저 다리(大理)와 리장(麗江) 지역을 돌아 청두(成都)로 가고, 다음에 청두에서 광위안(廣元)으로 가서 남쪽 촉도를 본 후 창춘으로 귀환하는 방식으로 짰다. 전시의 피난열차를 방불케하는 구정 전후의 교통난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동쪽은 평원이고 서쪽은 산악지역이다. 이런 지형에서 남과 북을 가르는 기준은 동쪽의 경우 화이하(淮河)이고, 서쪽의 경우 친링산맥(秦嶺山脈)이다. 그런데 촉 지방은 친링산맥이 바로 밑 지역이 아니라 그 아래에 있는 다바산맥(大巴山脈) 아래 지역을 가리킨다. 친링산맥과 다바산맥 사이에는 한중(漢中)지역이라 부르는 분지가 형성되어 있고, 다바산맥 아래에 있는 쓰촨(四川)분지를 촉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 때문에 촉도는 북쪽 촉도와 남쪽 촉도로 나누어진다. 장안(長安, 현재의 西安)이 자리 잡고 있는 관중(關中)지방에서 친링산맥을 넘어 한중지방으로 가는 산길을 북쪽 촉도라 부르고 한중지역에서 다바산맥을 넘어 쓰촨지방으로 가는 길을 남쪽 촉도라 부르는 것이다. 나는 두 차례에 걸쳐 촉도를 찾았는데 첫 번째는 남쪽 촉도에서 가장 유명한 자링강(嘉陵江)의 금우도(金牛道)를 보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북쪽 촉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포사도(褒斜道)를 보기 위해서였다. 

검문관(劍門關). 쓰촨 검문산 최고봉인 대검산에 있는 군사요새.
광원에서 옛날 촉도를 제대로 보고, 걷고, 느끼자면 먼저 남쪽으로 검문관(劍門關)을 찾아 산을 넘어가는 길을 보아야 하고 다음에는 북쪽으로 명월협(明月峽)을 찾아 강에 걸린 길을 보아야 한다. 이 두 곳을 찾아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옛길을 걸으며 나는 행복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촉도를 보고 싶어했던 소망이 이루어진 탓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검문관에서 제갈량의 체취를 맡은 탓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공부보다 ‘삼국지’를 읽는 데 몰두했고 중학입시에 떨어졌었다. 그래서 농사꾼이 되라는 아버지의 불호령 아래 소를 먹이며 1년을 보냈지만 대학입시 때는 초등학교 때의 독서 덕분에 제갈량의 출사표를 쉽게 해석할 수 있었다. 제갈량은 그렇게 나에게 새옹지마의 인생을 가르쳐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는 그를 통해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학식과 윤리, 공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포용력과 엄격함, 인간관계에서 갖추어야 할 신의와 의리를 배웠다. 그래서 나는 제갈량이 천험의 요새를 자랑하는 자리에 세운 검문관에서 파촉의 심장인 청두를 향해 굽이굽이 이어진 촉도를 천천히 오가며 그에 대한 개인적 추억과 그가 키우던 중원 도모의 꿈을 떠올렸고 행복할 수 있었다.

산의 정상에 있는 검문관 남쪽으로는 거대한 바위가 갈라져서 만들어진, 버스 1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절벽 사이의 길이 200여m 가량 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이백이 “검각의 봉우리들은 가파르고 뾰족해서,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사람도 뚫지 못하네(劍閣?嶸而崔嵬, 一夫當關, 萬夫莫開)”라고 말한 구절은 바로 이 같은 길의 모양을 두고 읊은 것이었다. 나는 이 바위 절벽 사이의 촉도를 걸으며 강유(姜維)가 3만의 대군으로 이곳을 지키던 장면과 위나라의 명장 등애(鄧艾)가 음평(陰平)의 산길로 우회하여 촉을 멸망시키던 장면을 떠올리고는 안타까움보다는 제갈량이란 거인이 사라진 후의 공허함을 생각했었다. 

자링강(嘉陵江). 쓰촨성을 흐르는 양쯔강(揚子江)의 제3대 지류. 명월협은 자링강의 상류에 있다.
명월협에 걸려 있는 촉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촉으로 가는 길의 험난함을 자링강 협곡에 걸려 있는 옛날 잔도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강의 양쪽에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 수직의 가파른 절벽과 그 절벽을 따라가며 마치 눕혀 놓은 사다리처럼 걸려 있는 잔도에서 아래의 강물을 내려다보면 오금이 저려서 발걸음을 떼기조차 힘들었다. 이런 길을 아득한 진나라 시대에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절벽에 아래위로 나란히 달리는 홈을 파고 그 홈에 통나무 말뚝을 박아서 만든 길, 그 옛날에 아무런 장비도 없이 사람의 힘으로 이 길을 어떻게 건설했을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아마도 이백의 말처럼 “땅이 꺼지고, 산이 무너지고, 장사들이 죽는(地崩山?壯士死)” 그런 엄청난 사건이 있은 후에야 “하늘에 걸린 구름다리 같은 잔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然後天梯石棧相鉤連)”.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젊은이가 절벽에 매달려 홈을 파다가 떨어져 죽는 일이 있은 후에야 이 길은 만들어졌을 것이다. 

광위안잔도(廣元棧道)-명월협(明月峽). 쓰촨과 산시(陝西)를 잇는 교통의 요지인 광위안 북쪽에 있는 명월협에 세운 고잔도.
그렇지만 잔도는 오랫동안 중국 서부지역의 중요한 간선도로로서 중원지방과 쓰촨지방의 인적·물적 교류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 관중지역이 중국역사의 중심지였던 진·한·당 제국 시절 수도인 장안과 촉의 청두를 연결하는 가장 빠른 교통로는 이 잔도였다. 여러 개의 잔도 중에서도 장안에서 한중으로 넘어가는 포사도와 한중에서 청두로 넘어가는 금우도가 가장 빠른 고속도로로 널리 이용되었다. 이 고속도로를 따라 수많은 물건이 오가는 교역이 이루어졌고, 군대가 진군하고 후퇴하는 전쟁이 발발했고,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애틋한 일들이 발생했고, 이질적인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하는 교류가 일어났다. 그래서 잔도는 교역의 길이고, 전쟁의 길이고, 문화의 길이고, 상봉과 이별의 길이었다. 

측백나무 숲. 역도(驛道) 주변에 심은 측백나무가 긴 세월이 지나 무성한 측백나무 숲이 되었다. 둘레 2미터 이상 된 나무는 진나라 때 심은 것이다.
중국사람들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밝을 때 잔도를 수리하는 척하며 어두울 때 진창으로 간다(明修棧道, 暗渡陳倉)”는 말은 이 잔도가 전쟁과 관련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咸陽)에 먼저 입성하는 공을 세웠음에도 항우의 위세에 눌려 궁벽한 한중지역으로 쫓겨나 처박혀 있어야 했던 유방은 한신을 중용하여 권토중래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내가 두 번째로 찾았던 한중지역의 포사도는 유방이 한중지역으로 쫓겨 들어오며 중원 도모에 대한 항우의 의심을 없애기 위해 스스로 불살라버렸던 잔도인 동시에 한신이 중원으로 군대를 진출시키기 위해 수리하는 척한 바로 그 잔도였다. 한신은 낮에 포사도를 수리하는 척하며 더 외지고 험한 진창 고도를 통해 몰래 관중지역에 성공적으로 군대를 진출시킴으로써 한 제국 건설의 일등공신이 될 수 있었다.

교역의 길이기도 한 잔도를 통해 오간 상품 중 잊을 수 없는 과일은 리즈(?枝)이다. 나는 이 과일의 맛에 매료되어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열심히 과일가게를 들락거렸다. 또 그 때문에 이 과일과 관련된 양귀비의 이야기를 부지런히 찾아서 읽었다. 당나라 때 이조(李肇)라는 사람은 ‘당국사보(唐國史補)’라는 책에서 “양귀비는 촉 지방에서 태어나서 리즈를 무척 좋아했다. 남해에서 나는 리즈가 촉지방에서 나는 리즈보다 훨씬 맛이 있어서 매년 날 듯이 말을 달려 남해의 것을 운반해 와서 진상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시인 백거이는 리즈에 대해 “하루가 지나면 색이 변하고, 이틀이 지나면 향이 변하고, 사흘이 지나면 맛이 변하고, 나흘이 지나면 색과 향이 다한다”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당나라 시절에 수천 ㎞나 떨어진 광동지방의 리즈를 어떻게 맛이 변하기 전에 장안까지 운송할 수 있었을까?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두목(杜牧)은 당 현종과 양귀비의 호사한 생활을 비판하면서 “흙먼지 일으키는 한 필의 말에 양귀비는 웃으나/ 이 사람이 리즈를 가져오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 없네(一騎紅塵妃子笑, 無人知是?枝來)”라고 읊고 있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의 양귀비전(楊貴妃傳)에서는 “현종이 기병을 보내 수천리 길을 달려 신선한 리즈의 맛이 변하기 전에 장안까지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건대 그리고 금우도의 바로 왼쪽에 있는 잔도의 명칭이 리즈도(?枝道)인 것으로 미루어 촉지방의 낙주(洛州, 현재의 ?陵)와 가주(嘉州, 현재의 樂山)에서 나온 리즈를 기병을 동원하여 장안으로 운송했을 것이다. 아마도 남해의 리즈보다 촉의 리즈가 더욱 분주히 잔도를 지나 장안으로 갔을 것이다. 나는 포사도 위에서 사흘 안에 장안으로 리즈를 전달하기 위해 밤낮으로 아슬아슬한 잔도 위를 달리는 기병의 모습을 상상하며 아득해졌다.

문학평론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이주빈 '신비로운 매력'
  • 이주빈 '신비로운 매력'
  • 한지민 '빛나는 여신'
  • 채수빈 '여신 미모'
  • 아일릿 원희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