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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선의 중국 기행] 시간의 풍경을 찾아서 ⑩ 둔황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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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4-04 20:51:37 수정 : 2012-04-04 20: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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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세불변’의 사랑을 꿈꾸는 여정
둔황(敦煌)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가끔 이런 질문을 나를 향해 던진다. 간쑤(甘肅)성과 칭하이(靑海)성과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가 만나는 꼭짓점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몰라서가 아니다. 둔황은 결국 내 마음속에 있다는 불교식의 관점을 몰라서도 아니다. 그럼에도 둔황은 어디에 있는지를 되풀이해 질문하는 것은 내가 만나고 싶어한 둔황과 실제의 둔황이 나에게 보여준 것 사이에서 어떤 시원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는 한 나는 다시 둔황에 가게 될 것이다.

내가 둔황을 찾은 것은 두 차례였다. 1990년대 중반에 개인적으로 둔황을 찾은 것이 처음이었고, 2000년대 중반에 학생 몇 명을 인솔해서 간 것이 두 번째였다. 그럼에도 둔황은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은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 기억과 관계가 있다. 둔황에 가면 그 기억과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나는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리적으로 실크로드상에서 둔황이 한 역할과, 둔황의 천불동(千佛洞)이 지닌 문화적 가치와, ‘둔황학’을 만들어낸 고문헌들의 학문적 가치를 몰라서가 아니다. 둔황을 찾았을 때 나에게는 그런 것들의 의미를 더듬어 본다는 표면적 이유의 밑바닥에 절실한 개인적인 다른 이유를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둔황이란 이름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에서였다. 내가 둔황이란 지명을 처음 기억하게 된 것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나 윤후명의 ‘둔황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이노우에 야스시의 ‘둔황’이란 소설 때문이었다. 지금 그 소설을 처음 읽은 정확한 시기를 떠올리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198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의 소설에서 얻은 서역지방에 대한 강력한 이미지와 슬프고 신비한 여운 때문에 나는 가나자와에 있는, 그가 다녔던 제4고보를 찾아 야스시 문학관을 둘러보았고, 당시에 막 개봉한 중·일 합작 영화 ‘둔황’을 도쿄에서 관람했었다. 그것은 80년대 중반경의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90년대 중반의 여름 어느 날, 둔황을 보기 위해 여행길에 올랐다. 20여년 동안 마음속에서 나를 재촉해온, 그럼에도 마음이 쉽게 내키지 않던 여행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둔황에 가면 무엇인가 분명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베이징(北京)에서 기차를 타고 시안(西安)과 란저우(蘭州)를 거쳐 둔황으로 갔다. 천불동을 보고 명사산(鳴沙山)에 오르면 마음 한편이 정리되리라는 기약없는 바람으로 여행길에 오른 것이다.

명사산(鳴沙山). 둔황시에서 남쪽으로 5㎞ 떨어진 곳에 있는 산. 바람이 불 때 산이 우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아서 명사산이라는 명칭이 붙어졌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둔황’에서 주인공인 조행덕(趙行德)은 전쟁터에서 우연히 만나 처음으로 살을 섞은 한 위구르 여인에 대한 기억을 오랫동안 가슴에 담고 있었다. 그 여인이 서하(西夏) 왕인 이원호의 첩이 되었다가 자살하는 것은 자신이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 역시 머리에서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다. 누구의 과오인지를 따질 수 없는 과거, 내 머릿속에 고여서 흐르지 않는 시간으로 남아 있는 과거가 불쑥불쑥 꿈속에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조행덕이 둔황지방에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운명처럼 만나듯이 나 역시 둔황에 가면 내 앞길이 좀 더 선명해지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서역 구만리의 길을 따라가면 과거의 정체가 분명하게 드러나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반신반의의 모호한 심정으로 둔황을 향해 떠나면서도 낙관적이 되려고 애썼다. 둔황에 가면 무엇인가 애틋하고 운명적인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끊임없이 오가는 여행자들, 기다림을 운명처럼 안고 사는 사람들, 매일처럼 마주치는 새로운 여행자들과 이들이 달고 온 새로운 문명들, 낯선 언어와 낯선 물건들, 일확천금을 노리는 눈빛들과 사막처럼 지치고 건조한 눈빛들 …… 둔황을 향해 가면서 나는 이 같은 풍경을 떠올렸다. 그래서 둔황은 하루하루가 싱싱하게 낯선 곳이다. 나에게 둔황은 눈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겨울의 모래바람도, 모든 생명체를 태워버릴 듯한 여름의 백일(白日)도, 두려움보다는 새롭고 신기한 풍경으로 다가오는 곳이 될 것이다. 그곳에 가면 나도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월아천(月牙泉). 명사산 안에 있는 초생달 모양의 작은 오아시스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입학이 결정되고 난 직후였다. 그리고 몇 달 후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있을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탔다. 그 후 우리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말싸움 한 번 없이 7년의 세월을 보냈고, 느닷없이 어느날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가 그때 나에게 한 말은 돌아가 달라는 한 마디였다. 의사가 되지 않은 내 탓이었다. 아니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좋다고 말한 그녀 탓이었다. 

둔황은 온통 모래의 도시였다. 내가 발을 내딛고, 손을 뻗치는 모든 곳에 미세한 모래가 쌓여 있었다. 길거리를 걸으면 신발의 무늬가 찍혔고, 호텔의 계단을 오를 때는 양탄자를 밟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작은 바람에도 사르르사르르 쓸리는 모래가 내 흔적을 하나하나 지우고 있었다. 사람들이 시간을 모래에 비유하는 것은 모래 위의 흔적이 바람에 사라지듯이 시간이 과거의 흔적을 지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왜 나의 기억은 흐르지 않는 물처럼 고여 있는 것일까? 둔황이라는 공간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모래는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한여름에 천불동을 둘러보는 일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 속에서 전진(前秦) 시기로부터 시작해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북위(北魏), 수(隨), 당(唐), 원(元)대에 이르기까지 조성된 부처와 벽화를 대강이나마 둘러보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리 산 도판을 들춰보며 몇 개의 그림과 부처를 고른 후 자주 늘어지는 몸을 동굴의 그늘에서 쉬게 하며 오후를 보냈다. 그때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비천상(飛天像)과 당나라 여인의 모습 앞에서였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날렵한 비천상과 풍만한 몸매를 자랑하는 당나라 여인상의 상호모순적인 모습 속에 숨어 있는 인간들의 열망 앞에서 나는 아득해졌다. 현세의 욕망을 사뿐히 뿌리치고 천상의 세계로 비상하는 듯한 비천상의 모습과 현세의 욕망이 한없이 충족되기를 바라는 듯한 당나라 여인상의 모순 앞에서 나는 나의 고뇌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둔황 비천(飛天). 둔황석굴 벽화의 대표적 형상인 비천은 불교에서 악기를 다룰 줄 알고, 무용에 능숙하며 온몸에서 향기를 내뿜는 보살이다.
명사산을 오르는 일은 천불동을 둘러보는 일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그늘 하나 없는 모래산을 나는 다른 관광객들과는 달리 낙타를 타지 않고 걸어서 올랐다. 멀리서 바라볼 때 명사산의 곡선은 한없는 부드러움과 자애로움으로 다가왔었지만 실제로 산을 오르는 일은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길만큼이나 멀고 힘들었다. 급경사의 흘러내리는 모래에 자주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나는 그렇게 명사산을 올랐다. 그렇게 명사산을 오르면, 한없이 깨끗한 모래가 요구하는 고행을 겪으면 무엇인가 달라지는 것이 있으리고 생각하면서 명사산을 올랐다. 그리고는 해질녘까지 산등성이에 앉아 푸르게 반짝이는 월아천(月牙泉)을 내려다보며 따가운 햇볕 아래 앉아 있었다. 내가 가진 모든 지저분한 욕망과 생각은 끊어버릴 수 없어도 여기에서 내 육체가 목숨을 다한다면 악취는 풍기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둔황석굴(敦煌石窟). 간쑤(甘肅)성 둔황(敦煌)시 동남쪽 25㎞ 지점에 있으며 막고굴(莫高窟)이라고도 부른다. 다양하고 방대한 규모의 불교 석굴, 회화, 조각을 가지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잘 보존된 불교예술의 전당이다.
명사산에 올랐던 그날 나는 밤이 깊도록 명사산을 떠나지 않았다. 모래 언덕에 누워 이제는 오히려 밤의 냉기 속에서 등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모래의 느낌을 즐기면서, 또 이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 보는, 그처럼 밝고 또렷하게 빛나는 별을 마냥 응시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영롱한 어떤 여인의 눈빛보다도 영롱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수많은 별빛을 응시하면서 세상의 일들을 잠시나마 잊어버릴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과거가 고통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움 때문이라면 명사산의 별빛이 보여주는 현재의 아름다움은 충분히 과거를 대신해 주고 있었다. 

둔황 채소(彩塑). 둔황석굴의 암석들은 딱딱하지 않아 조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장인들은 진흙을 이용하여 채색 점토상을 만들었다.
명사산을 내려오면서 나는 내 사랑에 대한 기억도 하늘의 별빛처럼 그리 멀리 아름답게 남아 있기를 바랐다. 과거는 변하는 것도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거기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 것인지가 문제일 따름이었다. 이런 생각에 잠기며 입구 쪽으로 걸어내려오는 나에게 갑자기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어둠 속에서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보이는 느낌을 준 그 여인은 사랑을 제의했다가 거절당하자 의외로 순순히 담배 한 대만 달라고 물러섰다. 그 여인에게 담배를 건네고 불까지 붙여준 후 명사산을 떠나는 내 머릿속에 불쑥 저 여인도 한때 영원한 사랑을 믿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저 고달픈 여인도 ‘천세불변(千歲不變)’이란 글씨를 안고 누워 있는 누란(樓蘭)의 미라처럼 둔황의 모래 위에 누워 변함없이 빛나는 하늘의 별에 눈을 고정한 채 남자를 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노우에 야스시가 둔황을 처음 방문한 것은 그가 소설 ‘둔황’을 쓴 후 20년이 지나서였다. 그때 그는 “둔황은 있었지만 사주(沙州·둔황의 옛이름)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만든 소설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다른 것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둔황에서 본 것은, 내가 거기에서 보고 싶어한 것은 둔황일까, 사주일까? 둔황에서 서역이 아니라 한국으로 발길을 돌리며 나는 이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지고 있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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