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홍정선의 중국 기행] 시간의 풍경을 찾아서 ⑧양저우, 그 번성의 이면에 대한 몽상

관련이슈 홍정선의 중국 기행

입력 : 2012-03-07 17:18:28 수정 : 2012-03-07 17:18:28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소금상인의 돈과 부패한 권력이 넘쳐났던 쾌락의 도시
소금 판매권 얻으면 6∼7배 이윤 보장
상인간 경쟁 치열… 관료에 뇌물 만연
대운하 통행땐 황실·관리가 우선권
양저우(揚州)는 25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이며, 아름다운 호수와 정원으로 강남의 풍정을 자아내는 도시다. 그렇지만 과거의 화려한 번영에도 눈에 보이는 풍경에만 감탄하는 요즘 사람들에게 양저우는 아담한 서우시후(瘦西湖)와 몇 개의 볼 만한 정원을 가진, 그저 그런 도시에 불과하다. 일반 사람들에게 양저우는 아름답기로는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에 미치지 못하고, 역사적인 의미에서는 난징(南京)에 미치지 못하며, 상업적인 번성에서는 상하이(上海)에 미치지 못한다. 이웃해 있는 도시들과 비교할 때 현재의 양저우가 지닌 이러한 상대적 빈곤함 때문에 양저우를 찾는 관광객은 많은 편이 아니다. 관광객들이 보기에 양저우가 자랑하는 호수와 정원들은 쑤저우의 정원이나 항저우의 호수만큼 매력적이지 않고, 양저우에 있는 역사 유적들은 난징의 유적에 비해 빈곤하며, 양저우의 거리는 상하이의 거리에 비해 쓸쓸하고 초라하다. 

양저우시 서쪽 교외에 있는 호수 서우시후(瘦西湖). 항저우(杭州)의 시후(西湖)보다 좁다 하여 서우시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필자는 양저우를 5∼6번 갔지만 양저우는 평범하지도 쓸쓸하지도 않았다. 필자는 양저우를 늘 상상에 잠겨 걸어다녔고, 상상 속에서 양저우는 일본, 신라, 동남아시아, 인도, 아랍, 중앙아시아 등에서 온,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국제적 도시였다. 물건을 가득 실은 배들이 줄지어 대운하를 오가고 있는 도시였고,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배들과 바다에서 들어오는 배들로 붐비고 있는 도시였다. 필자에게 양저우는 소금의 도시였고, 상인들의 도시였고, 쾌락의 도시였다. 돈이 넘치는 도시였고, 권력이 돈과 결탁한 도시였다. 필자에게 양저우는 이렇듯 현재형의 도시가 아니라 과거형의 도시였으며, 과거에 대한 상상 때문에 반성과 회한에 잠기게 하는 도시였다.

양저우(揚州)는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는 도시로 고대 중국 강남(江南) 물자를 운송하는 물류 유통의 중심지였다.
양저우의 거리에서 필자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소금 상인들이었다. 양저우는 소금 장사를 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번성한 도시였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재정수입의 상당부분을 소금전매에 의존했으며, 양저우 지역은 전국으로 소금을 배급하는 유통의 거점이었다. 소금은 집산지인 양저우에서 대운하를 통해 북으로 운송되거나, 양자강을 통해 서쪽으로 운송되었는데, 일단 소금을 판매할 수 있는 염인(鹽引)을 획득하기만 하면 6∼7배의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수지맞는 장사였다. 그런 만큼 권력과 결탁하려는 상인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했고, 온갖 부패가 만연했다. 대운하 연변에 소금 상인들이 점포를 열었던 옛날 양저우의 흔적을 더듬으며, 성공한 소금상인들이 살았던 거위안과 같은 정원을 둘러보며 필자가 머리에 떠올린 것은 이들의 삶을 다룬 ‘대청휘상(大淸徽商)’이란 드라마였다.

청나라 때 양저우에 살았던 후이저우(徽州) 출신 소금상인들이 직면했던 수많은 시련과 그럼에도 이들이 서로 돕고 단결하며 지켜나간 상도(商道)를 그린 ‘대청휘상’이란 드라마에서 필자의 머리에 오랫동안 인상 깊게 남은 장면은 상인과 관리의 관계였다. 하찮은 하급관리까지 상인 알기를 우습게 아는 풍토와 의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뇌물은 구조적·보편적 현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 드라마는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의 어떤 기록은 소금매매에 대한 관리의 개입이 너무 심해서 소금장사에 뛰어든 사람 중 열에 아홉은 망할 정도였다고 전해주고 있다. 이런 기록은 장사하기보다 장사에 개입하는 관리들 다루는 것이 더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황산(黃山) 아래에 있는 시티(西梯) 마을에서 볼 수 있듯 소금장사를 통해 돈을 번 후이저우 상인들이 고향에 남아 있던 자식들을 한사코 공부시키려 했던 것도 이들이 관리로부터 겪은 온갖 수모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저우시 서북쪽 교외인 레이탕(雷塘)에 있는 수양제(隋煬帝)릉.
양저우에 있는 수양제의 무덤을 찾아가며 필자가 두 번째로 머리에 떠올린 것은 최고 권력자의 방탕과 오만함이었다. 백거이(白居易)는 수양제의 행태를 비판하고 있는 ‘수제류(隋堤柳)’란 시에서 이렇게 썼었다. “천하의 재력은 이때 바닥났는데(海內財力此時竭)/배에서 들리는 노래와 웃음소리는 언제 그칠 것인가(舟中歌笑何日休)”라고. 수양제는 남쪽의 생산물을 북쪽으로 운송하기 위해 양저우를 관통하는 대운하를 건설한 사람이며, 결과적으로 남북경제의 소통과 발전, 특히 양저우가 경제적으로 번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당대에 그가 보인 행태는 방탕하고 사치한 생활과 오만방자함의 극치였다.

수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6년 동안에 걸친 공사기간 동안 수백만의 인력을 강제로 동원하여 혹사했다. 공사기간 동안에 죽은 사람의 숫자가 수십만에 달하는 참혹한 노역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운하를 완성하자마자 엄청난 비용과 인력을 동원하여 수도인 뤄양(洛陽)에서 양저우(당시 명칭은 장두·江都)에 이르는 사치스러운 여행, 방탕하기 짝이 없는 남순을 시작했다. 궁궐 규모의 거대한 용선을 건조하여 대운하에 띄우고, 이 용선을 1000여명의 사람이 2개월 동안 운하 양쪽에서 끌고 가는 가운데 수양제는 배 위에서 오나라와 월나라 지역에서 선발한 수백 명의 미녀와 매일같이 호화로운 파티를 열었다. 백성은 안중에도 없는 수양제의 이런 오만방자한 행태를 두고 백거이는 “배에서 들리는 노래와 웃음소리는 언제 그칠 것인가”라고 썼던 것이다. 

중국 4대 고전 양식 정원의 하나인 거위안. 거위안이라는 정원 이름은 대나무를 몹시 좋아하는 정원 주인이 대나무 잎사귀와 비슷한 한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이 같은 파렴치한 사치 행각을 벌인 수양제는 결국 양저우에서 죽었다. 그를 지키고 호위하던 부대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자살을 강요했던 것이다. 양저우 북쪽 교외지역인 레이탕(雷塘)의 들판 가운데 중국의 황제 무덤으로는 참으로 초라하게 남아 있는 수양제의 무덤은 황제 자리에 있을 때의 오만방자함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덤 자체가 백거이의 “뒤의 왕이 왜 앞의 왕을 거울 삼아야 하는지는(後王何以鑒前王)/수나라 운하 제방의 망국수를 보면 알리라(請看隋堤亡國樹)” 시구를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필자가 양저우의 서우시후를 유람하는 배 위에 앉아 세 번째로 떠올린 것은 과거의 대운하 풍경이었다. 현재는 호수로 바뀌었지만 과거에는 대운하와 연결된 수로였던 서우시후를 둘러보며 이 호수가 자랑하는 꽃과 버드나무와 누각에 관심을 쏟기보다 청나라 때까지도 운하를 가득 메우며 남북을 오르내리는 배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바빴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서우시후를 유람하며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는 중국사람들의 목소리마저 필자는 대운하 위에서 서로 빨리 가려고 싸우고 있는 선원들의 목소리로 착각하고 있었다. 

청나라 양저우 거상 허씨 가문이 만든 개인 정원인 허위안.
과거의 대운하에는 법으로 정해진 우선순위가 있었다. 국가의 세금인 양곡을 운반하는 조운선이 1순위였고, 둘째가 외국에서 온 조공선이었으며, 세 번째가 국가의 관선이었고 마지막이 상인들의 배였다. 그렇다면 빠른 시간 내에 물건을 운송하여 시세차익을 얻어야 하는 상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우선순위를 점검하는 관리들에게 읍소하고 아첨하면서 자신들의 배가 갈 수 있게 될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황실의 이런저런 용무를 빙자한 배, 거들먹거리는 황족들과 지방관리가 탄 배, 부임하고 이임하는 고관들이 탄 배들이 법규를 어기면서 힘없는 서민들의 배와 상인들의 배를 후순위로 밀어내는 것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무력함을 탄식하며, 마음속으로는 분노하며 바라보았을 것이다.

필자는 이 같은 상념들에 잠기며 무거워진 마음으로 양저우에서 술을 마셨다. 맛이 담백하고 화려한 색깔을 가진 양저우요리, 해산물을 많이 이용하고 간장과 설탕을 많이 넣어서 달고 진한 맛이 나는 양저우 요리를 시킨 후 술을 마시면서 번성하던 시절의 양저우가 지닌 퇴폐적 분위기에 젖어드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맨 정신으로 양저우에 앉아 있기에는 왠지 거북해서였다. 피곤한 상상을 멈추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이미지 속으로 빨려들어갈수록 과거의 부정적인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현재의 우리 모습과 중국의 모습이 술맛을 돋우고 있었던 때문이었다. 

당나라에서 17년 동안 머무르며 문학대가의 명성을 떨쳤던 신라 최치원을 기념하기 위해 양저우 탕성(唐城)에 세워진 최치원기념관.
양저우는 일찍부터 향락문화가 발전한 도시였다. 송나라 때의 시인 은운(殷芸)은 양저우의 향락문화를 두고 “허리에 십만 관의 돈을 차고(腰纏十萬貫)/학을 타고 양저우로 놀러간다(騎鶴下揚州)”고 썼었다. 아마도 그의 이 시구는 많은 돈을 가지고 양저우에 가면 신선처럼 놀 수 있다고 생각한 당대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양저우수마(揚州瘦馬)’라고 부르던 날씬한 미녀들의 시중을 받는 것이 과연 신선 같은 생활이라고 필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양저우의 술과 요리만으로 만족하며 청나라 시절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으며 예술활동을 펼친 양저우팔괴(揚州八怪)처럼 되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필자가 마지막으로 시켜먹은 양저우볶음밥은 그 유명함과는 달리 실제로는 너무나도 서민적인 평범한 요리였다. 양저우에서 신라의 골품제 사회로 돌아간 최치원이 느낀 기분이 아마도 내가 볶음밥을 먹는 기분과 같았으리라.

문학평론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