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우리 말이 많이 사라지는 시절이 없었어요. 용어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으면 나중에 그때 그 시점에서 멋대로 용어를 해석하게 됩니다. 점점 사라져 가는 농사일, 농기구, 살림살이에 대한 용어부터 시작해 국어사전·방언사전과 일일이 대조하며 정리했습니다. 누군가 해야 할 꼭 필요한 일을 우연히 제가 먼저 했을 뿐이고 저작권이라도 보호받으려고 응모했는데 좋게 평가해 주니 고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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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애환이 서린 전통소리를 젊은 세대들이 즐겨 들으며 맥을 잇도록 하는 게 소박하지만 간절한 꿈”이라는 공주의 소리꾼 공무원 이걸재 석장리박물관장. |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느닷없이 찾아온 가난으로 정규교육을 중단하고 친구 누나한테 책을 빌려다 무조건 읽기 시작했습니다. 17세 이후엔 도시락을 꾸려 20리 거리에 있는 공주문화원까지 가서 문학, 역사, 철학 책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요.”
두 번째 시련은 스무 살 때 찾아왔다. 몇 번의 각혈 끝에 찾아간 병원에서 “폐결핵 증세가 심화돼 얼마 못 산다”는 말을 들은 것. “이왕에 죽을 거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가난한 애인들’ 같은 제대로 된 작품이나 하나 남기고 죽자”고 다짐하며 직접 엉덩이에 결핵치료제를 주사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문인의 3대 조건이라는 가난·질병·죽음을 골고루 체험한 이 관장은 자연스럽게 문학에 입문한 것이다.
“전 등단제도를 거부합니다. 책을 내고, 많이 읽히면 된다는 생각으로 병치레를 하는 동안 200자 원고지 1만7000여장을 썼습니다. 공무원이 된 후엔 소재 고갈로 고민하다 봉사 겸해서 경로당을 들락거리다 제2차세계대전,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의 혼란, 한국전쟁 등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소설 소재를 구하러 간 마을 경로당에서 그는 어르신들이 흥얼거리는 ‘노랫말’에 주목하게 된다. 노래가사 속에 들어 있는 의미들이 자신이 쓰려던 소설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발견한 이 관장은 잠시 ‘문학’을 뒤로하고 노랫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공무원이냐, 문학이냐, 민속이냐를 놓고 잠시 고민했으나 금세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공무원으로서 정년은 채우되 사무관 승진을 포기하고, 문학은 언젠가는 하되 지금은 안 하고, 대신 ‘민속’을 제대로 하자고 마음먹은 뒤 본격적으로 민속 채록에 나섰습니다. 마침 문화예술계에 발령이 나고 민속학계의 대학자인 심우성 선생이 공주 의당박물관장으로 오시는 바람에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취미가 일이 된 이 관장은 그 후에도 ‘경천 호미씻기놀이’ ‘의당면 집터 다지기’ 등을 발굴해 도문화재 지정을 추진하는 한편 공주시가 역점사업으로 추진한 ‘백제문화재’ 준비에도 열성을 다했다.
“1년에 총 열흘도 쉬지 않고 일에 미쳐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소리꾼 장사익 선생한테 ‘공주 아리랑’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더니 ‘걸재 형이 직접 불러봐. 더 나이 들어 쭈뼛쭈뼛하지 말고, 내일부터 당장 시작해!’라는 말을 듣고, 고민할 틈도 없이 다음날부터 북 하나 달랑 들고 금강교 밑에서 소리를 연마했습니다.”
‘내가 직접 부르지 못하면 어느 누구한테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이 관장은 스승도 고수도 없이 해가 질 때부터 밤늦게까지 3개월 동안 매일 연습했다. 금강교 위를 지나는 자동차 소리를 이기기 위해 목이 쉬도록 연습 또 연습을 했다.
“흥이 안 나면 고통스럽고, 흥이 나면 박자가 늘어지는 등 소리를 잡아줄 사람이 없어 매우 힘들었습니다. 혼자 연습을 하는 게 안타깝게 보였던지 함께 일하던 최병숙씨가 북을 쳐 보겠다고 해서 지금껏 손발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가 소리에 쉽게 흥취할 수 있었던 것은 소리꾼이었던 선친 이강습씨의 영향이 컸다. 어릴 적 자연스럽게 소리를 익혔지만 선친이 작고한 뒤 한동안 소리를 잊고 지냈을 뿐이다. 목을 가다듬은 이 관장은 1999년 전통찻집에서 첫 발표회를 가졌다. 그리고 매주 공연을 펼쳤다. 큰 공연 전엔 치매노인들이 입원해 있는 노인병원에서 리허설 겸 위문공연을 했다.
공주·예산이 원조인 ‘각설이타령’을 비롯해 ‘창부타령’ 등 레퍼토리도 다양해졌다. 특히 심우성 선생이 구해준 북한·중국·옌볜·길림·북해도·사할린 아리랑을 채록한 CD에서 발견한 ‘독립군 아리랑’에 관심이 쏠렸다. 독립군들이 군가 겸해서 부른 아리랑으로 가사는 예산의 ‘광복군 아리랑’과 비슷했다. 공연 땐 반드시 ‘통일염원 비나리’와 “어떤 사람은 팔자가 좋아 고대광실 높은 집이 진담부대 물구 흥타령을 하는디/ 날 같은 팔자는 지게 목발만 두딩기는구나/ 아리롱 아리롱 아라리야 아리랑고개로 넘겨주게”로 시작하는 ‘공주 아리랑’으로 흥을 돋운다.
그동안 개인발표 무대를 포함해 수백 회의 소리공연을 치렀다. 공주뿐만 아니라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이 무대였다. 일본에서도 7회, 대만에서도 1회 공연을 가졌다. 최근엔 서울강동초등학교에서 학생 600여명을 대상으로 1시간30분 동안 신명나는 공연을 가졌다. 요즘도 청소년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공연은 시간과 거리를 구애받지 않고 전국 어디든 달려간다. 출연료도 안 받는다.
“청소년들에게 우리 문화를 전수하지 못하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전통 풍장판에서 우리 소리를 짜증스러워하는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면 어떨까를 생각하면 잠도 안 올 지경입니다. 재능을 보유한 문화계 인사들이 너무 명함 크기, 이름 크기를 놓고 싸움질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는 청소년 중에 국악스타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국악이든, 우리 소리든 청소년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어설프게 흉내만 내선 우리 것과 더 멀어질 수 있으므로 우리 소리를 제대로 배워 제대로 즐기고 제대로 향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리 명인이나 가야금 명인, 판소리 명인은 국립국장이 아닌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공연해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있는 곳이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혼신을 다해 파고들어야 그들도 감동하고 관심을 갖지 않을까요? 신명나는 우리 소리와 혼을 전하는 일에 전 여생을 다 바칠 생각입니다.”
요즘엔 ‘나이 든 광대가 손으로 돌리는 열두 발 상모’ ‘땅에 놓인 줄 타기’ ‘낫 두 개로 소리내기’ 같은 좀 모자라 보이는 우리 문화를 세련되게 만드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이 관장은 “없어지는 우리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절대 설렁설렁해선 절대 안 되고, 죽기 살기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주=글·사진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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