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은미희(51·사진)씨의 새 장편소설 ‘흑치마 사다코’(자음과모음 펴냄)는 바로 조국과 민족을 버리고 일제 편에 섰던 친일파이자 민족반역자인 배정자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생의 어두운 단면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증, 유려한 글쓰기를 해온 은미희씨라도 배정자의 삶을 정면으로 다루는 건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터. 그래서 그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밝힌다.
“김옥균을 좇아가다가 배정자를 알게 됐다… 친일파 청산만 제대로 되었더라면 배정자에 관해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배정자를 비롯한 친일 인사들은 광복이 된 뒤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얼마 가지 못해 슬그머니 풀려나 버리고 말았다… 아픈 역사고 부끄러운 역사이지만 제대로 알고자 했다.”
소설은 배정자가 아버지가 처형된 뒤 숨어지내던 절을 뛰쳐나왔다가 관에 붙잡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관기가 된 그는 빼어난 미모를 무기로 삼아 비참하고 굶주린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나고자 양반들을 유혹한다. 아버지 친구 밀양부사 정병화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갑신정변 실패 이후 일본에 머물고 있던 개화파 인물 안경수와 김옥균 등을 만난다. 하지만 비루했던 삶과 조선에 대한 반감은 일그러진 욕망과 탐욕으로 타오른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된 그는 사다코(정자)라는 이름과 함께 밀정교육을 받고 조선으로 파견돼 치밀하게 고종 등에게 접근해 대한제국의 기밀을 일제에 전하면서 한국 병탄에 일정한 역할을 한다. 이토가 안중근의 총에 맞아 사망하자 사다코는 시베리아를 떠돌며 마적단 속으로 잠입해 암약한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수세에 몰리자 조선의 여인들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쟁터로 내몰기까지 한다.
은미희씨의 이 문제적 소설은 결코 배정자에 대한 면죄부로 전락하지 않는다. 소설적 완성도라는 장치에 기대지 않고 오히려 배정자의 일그러진 욕망과 탐욕을 적나라하게 그려냄으로써 어리숙한 동정과 애잔함을 확연히 넘어서기 때문이다. “책이 나오기까지 참 마음고생이 많았다”는 은씨가 “지금, 그녀를 역사 속에서 다시 불러내 심판대에 세운다”고 말한 이유다.
김용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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