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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에 맘먹고 소설처럼 술술 읽을 수 있는 인류 문명사가 나왔다. 전 6권의 3200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읽기에 부담 가지 않을 만큼 재미있게 쓰인 게 특징이다. 문명사 하면 통상 판에 박은 듯이 서양사 중심의 저작물이 대부분이지만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서양사는 이집트와 중동 문명 등 아시아 문명을 모태로 미개 상태를 벗고 문명을 발달시켰으며, 인류 문명의 발달 과정을 보면 절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있게 발전해왔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윌 듀런트 지음/안인희·왕수민 외 옮김/민음사/각권 2만3000∼3만원
문명이야기 1차분 6권/윌 듀런트 지음/안인희·왕수민 외 옮김/민음사/각권 2만3000∼3만원

20세기 초중반 미 컬럼비아 대학의 유명 철학자였던 윌 듀런트(1885∼1981)는 1930∼50년대 지식인들에게는 중요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 지식인들은 그를 통해 철학과 역사의 교류에 눈을 떴다고 평자들은 풀이한다. 듀런트는 1926년 현대 철학의 새 지명을 연 ‘철학 이야기(The Story of Philosophy)를 낸 이후, 50여년간 심혈을 기울여 11권짜리 대작을 냈다. 지금 소개하는 ‘문명 이야기(The Story of Civilization)’다. 애초 듀런트는 현대사의 지형을 이룬 19세기만을 서술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역사는 이전의 이야기를 알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류의 전 역사 연구에 몰두했다. 인생의 3분의 2를 투자한 셈이다.

듀런트가 집필 구상을 할 당시 유럽은 새로운 전운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궁지에 몰린 독일은 재무장을 착착 진행 중이었고, 일본은 조선을 병탄하고 만주를 집어삼켰으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공시킨 구소련은 동유럽을 호시탐탐 노리던 위험한 시기였다. 듀런트가 인류 문명사를 집필하게 된 것도 이런 시대적 동기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간이 미개함을 벗고 문명을 이루기 시작한 게 언제인데, 파괴적인 전쟁을 또 치러야 하는냐”는 물음에서부터 서술을 시작한다.

나일강변에 만들어진 고대 이집트의 람세스 2세 신전. 석조 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는 유럽과 미국은 아시아 문명의 응석받이이자 손자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조상인 동양의 풍요로운 유산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꼬집는다. 종래 서양사 중심의 서술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듀런트는 “서양의 이야기는 동양에서 시작된다. 아시아가 가장 유서 깊은 문명의 장으로 유명해서가 아니다. 동양의 문명들이 서양의 시작인 그리스 로마문화의 배경과 토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어 “그리스와 로마가 현대 지성의 모든 원천은 아니다”면서 “서양 문명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발명품들, 예컨대 서양의 정치 기구 및 경제 과학 문학 철학 종교의 뿌리가 이집트와 동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저자는 현재 미국과 유럽의 패권이 급격히 기울어지고 아시아가 부활의 삶을 누리고 있는 역사적 순간에 있다고 했다. 이미 1970년대 아시아가 부상할 것을 예견하고, 일본과 중국의 부상을 비롯한 아시아 시대가 열릴 것을 예고한 바 있다.

그는 “상황이 이러한데 지금 인류 문명을 지배하고 있는 서양의 지성이 동양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면서 “평생을 연구에 몸바쳐도 서양의 학생에게 동양의 오묘한 성격과 신비한 가르침을 전수하기엔 역부족”이라고 실토하고 있다. 그는 유럽 이외에 이집트와 근동 지역, 인도, 중국, 일본,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 등지를 20여년간 직접 탐방했다. 특히 중국 조선 일본 등 극동지역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듀런트는 연구 8년여 만인 1935년 제1권 ‘동양 문명’을 먼저 내놓은 이래 1975년 제11권 ‘나폴레옹의 시대’를 내놓았다. 꼬박 50년 걸린 셈이다. 1968년에 낸 제10권 ‘루소와 혁명’은 그해 퓰리처 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서평에서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이미지로, 우리가 물려받은 문화의 찬란하고 거대한 파노라마를 보여 준다”고 격찬했다.

저자가 직접 확인하고 풀이한 동양의 문물은 적지 않다. 중·근세 유럽에서 발달한 수공예와 공학은 이미 모세 이전 이집트에서 고도로 발달했던 것이며, 아마포와 유리는 이집트에서, 비단과 폭약은 중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나침반은 중국에서 유래해 유럽의 산업혁명을 낳았으며, 고대 중동국가 수메르는 최초의 신용제도와 금은본위제가 통용되었다. 중국은 금이나 은을 종이로 대체하는 화폐가 등장하기도 했다.

아울러 이집트와 아시아에서는 역사상 최초의 경작과 관개시설, 맥주 포도주 차 등 힘을 북돋는 음료가 출현했다. 동방에서 창조와 홍수, 인간과 타락 구속 이야기가 나왔으며 유대에서는 오늘날 세계의 중심 종교가 탄생하는 토양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아우구스투스의 로마, 헤롯시대의 예루살렘 등 고대 전성기 시대를 맞을 준비가 갖춰졌다. 이어 플라톤과 카이사르, 그리스도가 주역이 될 서양사가 시작됐다. 저자는 동양문명을 서술하면서 이순신 장군에 대해 “지독한 한 장수”라고 묘사하는 등 조선에 관해서도 기술했다. 사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의 입장에서 쓴 글이라 사색적이고 글맛을 느낄 수 있다. 민음사는 듀런트의 저서 11권 가운데 1차분으로 1권 동양문명, 2권 그리스문명, 5권 르네상스 등 6권을 이번에 출간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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