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파리 루브르 박물관
중세의 루브르는 요새였다. 왕들이 기거하면서 왕궁으로, 다시 박물관으로 거듭났다.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은 뭘까. 입구의 유리 피라미드가 먼저 떠오른다. 박물관 내부를 처음으로 담은 영화 ‘다빈치코드’ 때문일까. 영화에선 피라미드 아래에 성모 마리아가 잠들어 있었다. 유리 피라미드가 만들어질 때 시민은 반발했다.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아이오 밍 페이는 “파리 시민 90%가 반대했다”고 토로했다. 불과 30년 전의 일이다. 요즘 관람객에겐 믿기 힘든 얘기다. 800여년간 우여곡절을 겪은 루브르, 그 안에 전시된 작품의 뒷얘기도 매력적이다.
중세의 루브르는 요새였다. 왕들이 기거하면서 왕궁으로, 다시 박물관으로 거듭났다.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은 뭘까. 입구의 유리 피라미드가 먼저 떠오른다. 박물관 내부를 처음으로 담은 영화 ‘다빈치코드’ 때문일까. 영화에선 피라미드 아래에 성모 마리아가 잠들어 있었다. 유리 피라미드가 만들어질 때 시민은 반발했다.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아이오 밍 페이는 “파리 시민 90%가 반대했다”고 토로했다. 불과 30년 전의 일이다. 요즘 관람객에겐 믿기 힘든 얘기다. 800여년간 우여곡절을 겪은 루브르, 그 안에 전시된 작품의 뒷얘기도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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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이 된 유리 피라미드. 오른쪽 건물이 리슐리외관이다 |
루브르 박물관은 원래 파리를 방어하는 성(城)에서 비롯했다. 1190년, 왕가의 주거지가 아닌 군 병참기지 용도로 지어졌으니 요새였던 셈. 쉴리(Sully)관 지하엔 중세 루브르의 성벽과 해자(적의 침입을 막으려고 성 주위를 파서 물을 채운 것) 일부가 복원돼 있다. 이곳에 관람객이 뜸한 건 유명 작품 대신 고리타분한 역사를 담은 탓일까. 지금의 파리는 센강을 품는다. 800년 전엔 강을 건너야 도시로 들어갈 수 있었다. 루브르는 당시 파리지엔에겐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것.
14세기 중반 인구가 늘면서 도시가 확장됐다. 파리 시민을 보호하던 루브르도 제 몫을 하지 못했다. ‘요새’ 루브르가 ‘왕궁’으로 변하게 된 계기였으리라.
16세기 초, 요새 루브르에 있던 거대한 망루까지 해체됐다. 이후 수십년간 왕가의 요구로 새 건물이 들어서면서 왕궁 이미지를 굳혔다. 하지만 당시 수백년 된 건물의 잔해, 건축 중이거나 새로 들어선 건물이 공존했다. 소음과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권력자에겐 탐탁지 않았으리라. 새로 튈르리 궁이 건설된 이유다.
튈르리와 루브르를 잇는 회랑도 여럿 생겼다. 450m인 회랑도 생겼다. 회랑을 만들던 왕이 죽자 내부가 텅 빈 채 15년 넘게 방치된 곳도 있었다. 수십년간 응접실, 회의실, 침실 등 곳곳에 왕가의 거처가 마련되면서 중세 루브르의 흔적도 희미해졌다. 17세기 말, 회랑에 고대 조각품들이 들어왔다. 첫 전시도 열렸다. 매년 파리에서 열리는 미술전람회의 시초가 바로 이 ‘살롱(Salon)’이라고 한다. 18세기 말, 루브르와 튈르리는 ‘왕의 거처이자 과학·예술의 집산지’로 규정됐다. 당대 유명 화가와 조각가들이 박물관 관리자로 지목됐다. 박물관 내부가 공개되면서 예술가들에게 우선 관람권이 주어졌다. 왕가의 컬렉션이 늘면서 왕가의 거처까지 전시공간이 확장됐다.
1871년 프랑스가 프로이센 전쟁에서 패한 뒤 72일간 이어진 민중봉기(파리코뮌)로 튈르리 궁 상당수가 불탔다. 10여년 뒤 궁이 해체됐다. 홀로 남은 루브르가 현대 박물관으로 굳어진 계기다. 20세기 들어 박물관 전시실이 더 확장됐지만, 전시공간이 없는 탓에 재무부 공간도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이 전시공간과 편의시설 확충을 위한 ‘그랑 루브르 프로젝트’를 공표했다. 아이오 밍 페이는 유리 피라미드 건축 계획을 내놓곤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궁 한복판에 피라미드를 세운다는 의미였을 테니, 당시에는 ‘이유 있는’ 불만이고 시위였을 듯하다. 지금은 한 해 수백만명이 루브르를 향한 첫 발을 내딛는 곳이 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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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트라케의 니케상은 여러 부분이 유실된 채 발견됐지만 평가가 후했다. 학자들은 니케상 발 밑에 배가 있는 탓에 해전 승리를 기념해 신에게 바쳐진 것으로 추정한다. |
‘ㄷ 자(字)’ 모양으로 길게 뻗은 루브르 박물관의 중앙 입구(유리 피라미드)에서 ‘열린’ 방향을 보고 서면, 왼쪽으로 센강과 인접한 드농(Denon)관이, 오른쪽으로는 리슐리외(Richelieu)관이, 뒤쪽으론 쉴리관이 자리하고 있다.
지하부터 3층까지 작품이 즐비하지만, 드농관 3층만 전시실이 없다. 수백개의 전시실, 전시실마다 그림과 조각 등이 수십점…. 무엇부터 봐야 하나.
루브르는 절대 놓쳐선 안 될 작품으로 ‘밀로의 비너스상’, ‘사모트라케의 니케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꼽는다. 밀로의 비너스상(BC 130∼100년 제작 추정)은 1820년 에게해의 밀로 섬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 인근에서 발견됐다. 이 작품은 그리스 농부, 섬에 있던 프랑스 해군 장교, 이스탄불 프랑스 대사를 거쳐 왕에게 헌납됐다. 발견 당시엔 그리스 거장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거장 사후의 작품으로 추정되자 작품 앞에 섬 이름이 붙은 것. 작자를 알 수 없는 조각품 앞엔 으레 발견된 곳의 이름이 붙는다. 양팔이 없는 채 발견된 탓에 학계에선 ‘사과나 거울을 들고 있었을 것’이란 의견이 분분했다. 앞모습과 달리 뒷부분 조각이 덜 섬세해 오래전엔 벽이나 움푹 파인 곳에 전시됐을 것이란 주장도 나왔다.
사모트라케의 니케상(BC 200년 추정)도 작자를 모른다. 1863년 에게해 북쪽 작은 섬 사모트라케의 신전에서 머리와 팔 등이 유실된 채 발견됐다. 신전을 굽어보는 높이에 있던 탓에 경외감을 줬다고 전해진다.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 니케의 발 아래엔 배가 놓여 있다. 해전에서 승리한 걸 기념해 신에게 바쳐진 것으로 추정된 이유다.
니케상은 발견 초기부터 ‘균형과 조합의 걸작’으로 평가됐다. 발견 당시 관능미 탓에 저평가된 비너스상과 달랐다. 니케상을 박물관 중앙에 전시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무산됐다. 대신, 동선이 가장 많은 쉴리관 1·2층 중간 계단에 자리 잡았다. 니케상을 올려다보며 계단을 오르거나 멀리서 바라보면 진짜 여신을 본듯 경외감이 느껴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1503년 추정)는 루브르만큼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때 ‘도대체 누굴 그렸는지’가 논쟁거리였다. 다빈치의 자화상이란 얘기도 있었지만, 당시 작성된 ‘미술가 열전’에 근거해 피렌체 부호인 조콘도의 ‘부인(모나)리자’로 수렴됐다. ‘모나’는 부인을 뜻하는 마돈나의 줄임말이다. 하지만 다빈치가 왜 초상화를 조콘도 부부에게 건네지 않고 소장했는지 알 길이 없다. 모나리자는 18세기 말 루브르 최초 ‘국립 컬렉션’엔 속하지 못했다. 19세기 초 재평가될 때쯤 튈르리 궁에 옮겨졌다 되돌아온 적도 있다. 1911년 이탈리아 노동자가 그림을 훔친 탓에 더욱 유명해졌다. 경찰 수사로 2년 만에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실제 모나리자를 보면 의외로 작다. 당시엔 그리 작은 게 아니었다고 한다. 다빈치의 다른 작품들이 워낙 큰 탓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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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로의 비너스상. 발견 당시엔 평가가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루브르 명작 중 하나로 꼽힌다. |
루브르 성이 ‘궁전’으로 변모할 때 지어진 튈르리 궁은 300년간 프랑스 왕가의 화려함을 뽐냈다. 박물관 기능까지 겸한 시절이 있었지만 당시 튈르리 궁을 표현한 그림들에선 왕가의 사치만 묻어날 뿐이다. 루브르 박물관을 꼼꼼히 살펴보면 화려했던 튈르리 궁을 그린 그림이 상당하다.
튈르리는 기와 굽는 가마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지극히 서민적인 이름이다. 하지만 1871년 시민봉기로 튈르리 궁 대부분이 불탄 끝에 결국 해체됐다.
이후 자동차박람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지만 본격적으로 정원으로 복원되기 시작한 건 1945년부터다. 당시 문화장관인 앙드레 말로는 19세기 조각품을 들여와 정원을 채워 나갔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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