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 남자가 필요한 이유는 차고 넘쳤다. 우선, 배우 현빈, 장동건, 원빈 같은 꽃미남을 좋아하는 여자들이라면, 당연히 남자(배우)가 필요할 것이다. 시린 겨울 옆구리를 채워줄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픈 (여자)이성애자 역시 남자가 필요하다. 반면, '남자 따위가 왜 필요해?'라고 시니컬하게 반응하는 부류도 있다. 대체로 그들은 남자가 필요 없는 레즈비언이거나 남자에게 심한 배신감을 경험한 후 남자를 절대 믿지 못하는 여자인 경우가 많다.
극단 현대극장의 연극 [남자따위가 왜 필요해?](연출 김진영)는 후자의 시각에서 출발해 전자의 시각으로 이동하는 작품이다. 즉, 작가 마르조리(방은희)의 저서 '남자 따위가 왜 필요해?'란 질문으로 관객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더니, 곧 이를 뒤집어 남자가 필요한 이유를 절묘한 상황 상황을 통해 보여준다. 그것도 멋진 꽃미남이 아닌 여자들에게 항상 퇴짜 먹는 찌질남 찰리(장덕수)가 모든 여자들에게 필요한 이유를 만나볼 수 있다.

연극 [남자따위가 왜 필요해?]주인공 테리(차현정), 찰리, 마르조리는 이웃사촌간이다. 테리의 부모님이 테리의 남자친구인 조(김지완)를 보러오기 위해 테리 집을 방문하면서 거짓말의 향연이 시작된다. 테리와 조는 사랑싸움으로 잠시 헤어져 테리는 가짜 남자친구(찰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찰리는 이제 한편의 연극 속 주인공이 되어 테리의 남자친구 조 역할을 해내면 된다. 아니 해 내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찰리는 마리조리 남자친구 조 역할에 한 발짝 먼저 뛰어 들어버렸다. 이때부터 연극은 걷잡을 수 없는 로맨틱 코미디 속으로 관객들을 데려간다.
연극 속 주인공들은 모두 찰리를 필요로 한다. 우선, 테리는 자신의 부모 앞에서 남자친구 인척 해주는 찰리가 필요하고, 테리 엄마 게일(허윤정)은 다정다감하고 요리도 할 줄 아는 남자 찰리가 필요하다. 테리 아빠 밥(배수현)은 자신과 비슷한 마초 스타일의 찰리를 발견하고선 기쁨을 느낀다.
여기까지 보면, 찰리는 이 세상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될 훈남이자 매력남이다. 연극 무대 영상 속 찌질남 찰리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이미지이다. 사실, 찰리는 그 누구보다 여자들에게 사랑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곱슬머리에 작은 키가 걸린다. 소파에 멋드러지게 앉아 테이블 위로 자연스럽게 다리를 뻗어보고 싶지만 신체적 조건상 역부족이다. 세상에는 찰리보다 키가 큰 여자들이 많다. 찰리는 그녀들을 위로 올려다 보아야 한다. 그도 아니면 받침대 위에 올라서야 여자들과 겨우 눈높이를 맞출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찰리의 불리한 신체적 조건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거부할 수 없는 '매력남'이라는 사실만 마음 속에 담아진다. 이유는 세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찰리는 노력파이다. 찰리는 모든 인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 꼬이고 꼬인 관계 속에서 실수하지 않기 위해 메모를 하며 만반의 준비를 한다. 흔히 남자들이 오래 사귄 여자친구 혹은 부인에게 노력을 하지 않은 것과 비교할 때, 찰리는 성실한 노력파로 여자들의 지지표를 얻을 듯 하다.
두번째, 찰리는 다정다감하다. 찰리는 테리의 남자친구 조가 갖추지 못한 배려심과 섬세함을 지녔다. 마르조리의 남자친구가 되었을 땐 여자친구의 저서를 읽어보는 섬세함을 내보이기도 하고, 사랑에 목마른 테리 엄마, 섹시한 외모의 비서 크리스틴(추소영)이 원하는 이상형과도 거의 흡사하다.


세번째, 찰리는 연기를 잘한다. 사랑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도 '연기하는 센스'가 필요하다. 찰리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매력을 발사한다. 극 속에서 찰리는 조와 함께 동성애자로 몰리기도 한다. 여기서 찰리는 단순히 폭소만 전하지 않고, 조에게 여자들이 원하는 자상한 연기를 전수해주는 센스를 발휘한다.

심지어 마르조리를 비판하려고만 하는 기자 로라(이지예)에게 '솔직함'에 대한 강연을 펼쳐 그녀의 인생관을 바꿔놓기도 한다. 레즈비언 마르조리가 그동안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남자의 매력도 맛보게 해 남자는 쓸모 없다고 설파한 작가의 논조를 뒤집어놓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남자따위가 왜 필요해?' 가 아닌 '찰리 같은 남자는 당연히 필요해'다는 말이 튀어나오게 된다.
배우인 찰리는 그동안 관객들과 만날 기회가 없었고, 남자인 찰리는 여자들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진짜인듯 가짜인듯 연극 속 주인공이 된 찰리는 배우로서 연기를 배우게 되고, 남자로서 사랑에 대해 깨닫게 된다. 아니 주인공 찰리로 분한 배우 장덕수가 제대로 물 만난 듯 그동안 감춰 둔 연기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연극이 끝난 후, '찰리같은 남자는 꼭 필요해, 당연히 배우 장덕수도 필요해' 에 한표 던지게 될 것이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otrcoolp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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