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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예술기행] 아르헨티나 ③ 열정의 색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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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1-26 21:58:39 수정 : 2011-01-26 21:5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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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하늘 캔버스에 아득한 희망을 그린다 아르헨티나 작가들에게 탱고는 언제나 몸을 깨우는 리듬인 모양이다. 보카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아르헨티나 원로작가 로베르토 델 비야노(Roberto del Villano)도 오후의 나른함을 탱고 리듬으로 녹여내고 있었다. 붓을 손에 잡은 채 몸을 리듬에 맡겼다. 캔버스엔 남자 무용수에게 경의를 표하는 춤추는 무희의 동작이 붓질의 현란함으로 형상화됐다. 블루톤의 화면에 더해진 몇 가닥 붉은색 붓질은 무희의 내면적 열정을 드러내 보여주는 듯하다. 흰색의 붓 자국들은 격렬한 몸놀림의 공간을 짐작케 해준다.

델 비야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탱고음악을 듣고 자랐다. 자연스럽게 탱고를 테마로 그림을 그리게 됐다. 물론 그림 주제는 다양하지만 탱고는 그에게 가슴 저 밑바닥에 흐르는 강물과 같은 정서다. 한민족의 아리랑 같은 정한의 정서라고나 할까.

▲로베르토 델 비야노의 ‘춤추는 무희’. 남자 탱고 무용수에게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다. 라틴아메리카 미술과 문학의 특질이 ‘환상적 현실’임을 엿보게 해준다.
그의 부친은 이탈리아에서 이주한 탱고 반도네온 연주자였다. 탱고 연주로는 밥벌이가 되지 않았지만 여러 일을 해 가면서 반도네온 곁을 지켰다. 그는 무엇이 아버지를 탱고에 머물게 했는지가 궁금했다. 반도네온 연주도 익히면서 탱고 연구에 몰입하기도 했다.

그가 꺼내온 빛바랜 책에선 초기 탱고 무희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정장 차림의 남녀 모습이다. 탱고 춤 옷차림이 지금 같은 노출은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자료다. 탱고 춤이 술집이나 무대에 올려지면서 무희의 옷차림은 점점 더 야하게 변해갔다. 상업적 공간에서의 볼거리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델 비야노에게 부친이 탱고에 빠진 이유를 알아냈는지 물었다. 대답으로 돌아온 말은 너무나 단순했다. 부친에게 탱고는 삶이자 살아 있음의 증명이라 했다. 이주자에게 새로운 장소에서의 정체성은 그렇게 형성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색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많은 이들이 블루를 꼽는다. 한국의 가을 하늘 같은 옥색이라는 표현이 우리에겐 더 다가온다. 한국인이라면 가을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왠지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던 추억 하나쯤은 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하늘에 많은 꿈을 그려 넣기도 했다.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들에게 하늘의 블루는 희망을 쓰는 캔버스였다. 현실에선 희망을 쓸 수 없었기에 하늘은 유일하게 위안이었을 것이다. 블루는 그래서 우울하기도 하지만 희망의 색조가 됐다.

인종과 문화가 들끓는 용광로 같다는 라틴아메리카, 그 문화의 혼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새로운 제3 문화를 형성한 그들만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곤란하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라틴댄스와 음악은 생경하기조차 했던 라틴아메리카 문화가 한국문화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는 계기가 되고 있다. 문화란 그렇게 흘러오고 흘러가는 것이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혼재해 있는 라틴아메리카 미술의 정서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을 찾는다면 바로 어려웠던 식민지 역사의 배경과 군부 독재라는 역사적 배경의 공유다. 그리고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뿌리의 연고를 들 수 있는데, 아이로니컬하게도 표현하는 방식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근대 미술사에 나타난 작품 속에는 한을 곰삭이듯 내재시키지만, 라틴사람들은 그것을 폭발하듯 열정적으로 표출시킨다. 혼혈 후손들은 이종적인 문화를 통하여 생명력과 독창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 지역의 골동품 가게에 진열된 19세기 유럽가구와 생활용품들.
흑인, 유럽인, 아시아인까지 섞인 다양한 인종과 그에 따른 문화의 혼합으로 그들만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강렬하고, 유치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화려한 색감과 신비적 표현 기법은 현대미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며 라틴아메리카 고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구의 전통을 중남미적 신화와 전통으로 접목해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쳐나갔다. 현실과 꿈이 차별 없이 공존한다. 탈출구가 없었던 열악한 라틴의 현실 속에서 환상이 현실이 되고 그 현실이 또 다른 신화를 엮어 나가는 라틴아메리카인들의 정서 구조가 탄생하게 된다.

서구의 사생아라는 무력감에서 벗어나 신화, 미신, 종교, 토속적 신비주의를 버무려 문학과 미술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을 창출했다. 그 속에서 그들은 서구인과 대등한 인간의 동일성을 찾았다.

그동안 라틴아메리카의 미술은 미국이나 유럽의 평론가들에 의해 과소평가돼 왔다. 현실적으로도 유럽의 긴 미술 역사에 비해 훨씬 늦게 출발한 라틴 미술은 각광받지 못했다.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미술은 미국과 서유럽의 모더니즘에서 파생되었거나 그것을 모방한 것으로 치부되는 모욕적인 대접을 받아왔다. 이는 16세기 초 스페인이 멕시코를 정복한 이래, 유럽인들에 의해 주도된 인종 편견의 역사 서술도 큰 몫을 차지한다.

이 같은 편견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선 혼혈문화가 라틴아메리카 미술이 가지는 장점이란 점이 부각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미술의 생명력, 독창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근대 미술에 들어와서 멕시코의 벽화운동이 세계 미술사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고, 최근 들어 콜롬비아의 페르난도 보테로나 아르헨티나 출신 루시오 폰타나, 그리고 멕시코의 프리다 칼로 등이 세계 미술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델 비야노에게 아르헨티나 문화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말미에 자신의 작업실 근처에 있는 공예품 거리를 반드시 가보라고 권했다.

레골레타 거리다. 우리의 인사동 같은 곳이다. 이주민이 유럽에서 애지중지 싸들고 온 가구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런 고가구에서 아버지를 읽어낸다고 했다. 그가 레골레타 거리를 즐겨 찾는 이유다. 그것은 영원한 노스탤지어라 했다. 한 골동품 가게에 들어서니 주인 딸이 손님을 맞는다. 알렉시아 파랄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아가씨는 자신의 골동가게가 100년이 됐다고 소개했다. 가족 모두가 함께 운영하는 일종의 가족기업이라 했다. 온갖 물건들이 차 있는 100평 규모의 가게 뒤쪽에는 엄청난 규모의 수장고가 위치해 있었다. 컨테이너가 들락날락할 수 있는 규모다.

몇 년 전부터 외국에서 고가구를 사러 오는 이들이 이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유럽인들 중에서도 이탈리아 방문객이 다수를 차지한다.

터키 이주민인 한 가게 주인은 터키에서 프랑스 골동품을 사다가 팔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대부분 골동가구들은 아르헨티나 이주민들이 유럽에서 갖고 왔던 가구들이다. 유럽보다 워낙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유럽인들이 사 가는 경우가 많다. 가게 진열장에 전시된 한 대리석 벽난로에는 ‘3만달러’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20세기 초 그러니까 1900년 초 프랑스에서 만든 대리석 벽난로라고 했다.

가게 주인들은 지역마다 선호하는 물건들을 꿰고 있었다. 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프랑스식 대리석 골동품이고, 미국 사람들은 시골풍의 옛날 것을 좋아한다. 명품 현대가구보다 저렴해 인테리어 용으로 인기가 많다.

수장고에 들어가 보니 옛 시골 농가의 일상 용품이 가득하다. 나무로 만든 손때 묻은 와인셀러도 있다. 1년에 두 번 일반에 공개해 판매도 한다. 200달러에서 수천달러까지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한 거리 예술가가 익살스러운 무언극를 펼쳐 보이고 있다. 지나는 행인들에게 “삶이 행복하냐”고 묻는 듯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선 30개 골동품가게들이 함께 1년에 두 번 호텔에서 골동품 페어를 연다. 오래된 냉장고 등은 현대가구전시회 때 선보이기도 한다.

최근 들어 중국인들이 골동가게의 큰 손님으로 부각되고 있다. 10월부터 5월 사이에 중국인 컬렉터들이 관광을 겸해 몰려든다. 중국인 이주자들이 19세기에 가져온 중국 고가구가 이들 컬렉터에겐 최고 인기 상품이다.

골동 가게에선 19세기 유럽 가구들 중에서도 장인들의 사인이 있는 것을 명품으로 취급하고 있다. 사인이 없더라도 1733년의 독일산 가구와 18세기의 네덜란드가구는 가격이 높다. 수공의 노력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한 골동상에선 ‘마르케테리아’라는 사인이 있는 테이블을 볼 수 있었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 때의 가구이다. 서랍이 많은 것과 시골풍 가구도 많다. 이러한 것들은 현대에 와서 복제품이 많다. 유럽은 점점 골동품 오리지널이 희소해지는 반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민자들)에게선 골동품이 나오고 있다. 중국 골동품은 유태인들이 구입해 다시 중국인들에 팔기도 한다. 아르헨티나엔 중국 골동품 수집가들이 많아서 매매가 수월한 편이다.

골동품이 쏟아진 것은 10년 전부터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주거 형태가 변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미국, 유럽 특히 이탈리아와 프랑스 골동품상들이 많이 구입해 간다. 구입한 물건은 한데 모아 컨테이너로 운반을 할 정도다. 가구에 있어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르 데코와 아르 누보 스타일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편완식 선임기자

〈공동취재:안진옥 중남미 미술전문가, 권순익 화가, 김영재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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