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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배수아의 몽골 에세이] <9> 알타이 병에 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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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01-20 20:53:54 수정 : 2011-01-20 20: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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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밥에 소금 뿌려서 먹고 서서히 기력 회복 알타이 체류의 마지막 주가 되자 우리는 이제 아무도 봉지 홍차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봉지 홍차는 아침에 유목민의 일상 음료인 밀크티를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예를 들자면 한스-커피 대용품이 되어 주었다. 사람들은 보통 한 봉지의 차를 두세 번은 우려 마셨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이제는 아무도 인스턴트 커피를 갖고 있지 않았고, 그래서 아침마다 주방 유르테에서 뜨거운 물을 가져다가 컵에 가루 커피를 타서 마시며 하루의 첫 담배를 피우는 모습들도 사라졌다. 이제 아무도 음식에 뿌려 먹는 마기 조미료 소스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떨어졌다. 아침 식사 때 빵에 발라먹는 딸기잼도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딸기잼이 떨어지기 얼마 전부터 나는 잼 속에서 기묘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면 곰팡이 냄새였고, 그것도 아주 지독했다. 그래서 나는 잼을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플라스틱 용기에 든 딸기잼은 원래는 맛이 좋았으나 식사 때마다 따로 접시에 덜어내서 주는 게 아니라 그 용기 그대로 항상 식탁에 올라 있었으므로 여러 명의 사람이 너도나도 나이프를 이용해 떠먹은 지가 열흘은 되었을 것이고, 물론 알타이에는 냉장고 따위는 없다. 그리고 이제 심지어, 그 훌륭한 야크 버터마저도 떨어졌다.

◇사냥으로 잡은 늑대 가죽. 양을 기르며 사는 유목민에게 양을 잡아먹는 늑대는 천적과도 같다. 갈잔의 말에 따르면 늑대는 결코 “먹을 만큼”만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죽일 수 있는 만큼” 최대로 많은 양들을 죽인다고 한다.
그런데 버터가 떨어지자 유럽인들 사이에서 심각한 동요가 일었다. 항상 직설적인 릴로와 고디 부부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했다. 그들은 갈잔이 너무 인색해서 식량을 빠듯하게 준비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아침 식탁에 오른 빵은 딱딱하고 그것을 집어드는 우리의 손길도 기운이 없어졌다. 나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딱딱한 빵을 베어 물고 따뜻한 밀크티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부드러워진 빵을 목으로 넘겼다.

여행의 마지막이 가까워져 올수록 우리는 점점 더 음식에 대한 얘기를 자주 입에 올리게 되었다. 유르테의 양지바른 벽에 기대앉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먹고 싶은 음식을 화제로 삼는 것이다. 피자와 콜라, 초콜릿 등이 자주 등장하는 메뉴였다. 게르하르트는 나에게 와서 베를린의 값싸고 맛좋은 스시 식당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싶어했고, 자신이 사업상 알게 된 한국인 부부로부터 밥과 김치를 대접받은 이야기까지 털어놓았다. 옌스는 벌써 베를린 테겔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카페테리아로 달려가 진짜 커피 한잔과 독일식 케이크를 시켜 먹겠다는 결심을 이야기했다. 이 모든 현상들을 마리아는 끔찍하게 여겼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런 화제를 입에 올릴 때마다 마리아는 마치 사랑하는 알타이가 모욕당하는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초콜릿이나 콜라가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날이 기운이 빠져감을 느끼고 있었다. 알타이로 가기 전까지 나는 7년 이상을 채식주의자로 살았다. 그래서 알타이 여행을 결심할 때 나에게 가장 큰 장애로 다가온 것은 음식문제였다. 그곳에서는 유목민 식으로 양고기 위주로 식사를 해야 하고 다른 대안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여행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국식 먹을거리는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다.

◇유목민 노파를 진찰하는 한스. 일행 중 유일한 의사인 그는 알타이에서 많은 환자를 진료했다.
체류기간이 길어질수록 어느덧 나는 끼니 때마다 충분히 먹지 못한 데다가 간식이나 다른 영양을 섭취할 방도가 없는 상황에서 나날이 기운이 빠져갔고, 그렇게 몸이 쇠약해질수록 음식을 먹기가 더욱 힘들어지는 악순환을 겪고 있었다. 갈잔이 내 밥그릇에는 쌀죽이나 국수를 뜰 때 고기조각을 넣지 말라고 지시한 것 같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진동하는 양고기 냄새도 며칠 지나고 나니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스스로 나름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카자흐 가족이 내놓은 음식은 좀 달랐다. 그것은 고기와 치즈를 주사위 모양으로 썬 것인데 음식을 남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씹지도 않고 꾸역꾸역 삼켰고, 잠시 후에 체한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보드카를 몇 모금 홀짝인 것도 매우 심각한 증상을 불러일으켰다.

향나무 계곡의 화장실은 강에서 백여미터 떨어진 약간 높은 산비탈에 있었으므로 나지막하게 경사진 오르막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카자흐의 초대에서 돌아온 다음, 나는 화장실까지 가는 오르막을 걸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너무나 숨이 가빴기 때문에 최소한 세 번은 도중에 주저앉아서 한참을 쉬었다 다시 무거운 걸음을 옮겨야 했다. 내려오는 길에는 현기증이 났으므로 축축한 풀에 발이 미끄러졌고, 고개를 돌려 사방을 쳐다보는 것도 힘에 겨웠다. 그날이 가기도 전에 나는 내가 분명 병에 걸렸는데, 한국에서 가져온 여러 종류의 비상약 중 어느 것을 먹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는, 생전 처음으로 겪는 이상한 증상을 동반하는 병에 걸렸음을 깨달았다. 열이 났고 갈증이 심했으므로 나는 차가운 강물을 물통에 담아 벌컥벌컥 마셨다. 체한 증상으로 속이 메슥거렸으며 바체체가 에-센 하고 외치는 소리만 들어도 비위가 상하고 위장이 뒤집힐 듯이 울렁거렸다. 마리아가 “저녁밥 먹으러 갈 시간이야” 하고 말했는데, 또다시 그 말에 들어간 ‘에센’이라는 단어 때문에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토할 것 같았다. 소화제를 먹었으나 증세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이날 처음으로 저녁식사에 갈 수 없었다.

◇독일에서 가져온 완두콩으로 수프를 만드는 게르하르트. 위장이란 매우 보수적인 인체기관으로, 여행의 막바지가 되자 우리 모두는 가장 먼저 음식에 대한 향수병에 걸렸다.
밤에 침대에 누운 나는 일초 간격으로 숨을 헐떡거려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그 숨가쁨은 점점 더 확연하게 심해지는 중이었다. 미칠 듯이 숨을 몰아쉬며 공기를 폐 속으로 빨아들여도, 도리어 그 호흡행위로 인해 그나마 있던 산소가 몸 밖으로 빠져나가기만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가쁘게 숨을 몰아쉬게 되었고, 그럴수록 숨은 더 심하게 차 올랐다. 밤이 되자 몸은 더욱 떨리고 추워져서, 옷을 모두 껴입고 숄까지 둘렀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나는 거의 마비상태가 되어서 더 이상 두렵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견딜 수 없는 갈증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나는 현기증을 느끼는 채로 다시 강으로 가서 찬 강물을 물통에 떠서 마셨다. 엷지만 견고한 얼음의 겹이 내 발걸음과 심장의 움직임을 온통 감싸쥐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나는 얼어붙었고, 어쩌면 내가 보통의 예상보다 조금 더 이른 시기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르테로 돌아온 나는 마리아에게 한스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거의 30분이나 지나서 한스를 데리고 왔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유르테 안으로 허우적거리듯 어렵게 들어선 한스는 어둠 속에서 팔을 더듬거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는 입 속으로 웅얼거렸다. “환자는 어디 있는 거지…” 한스가 나뭇조각 파기 삼매경에 빠져 있어서, 곁에서 여러 번이나 부탁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렸노라고 마리아가 미안해 했다. 한스는 나를 슬리핑백에서 나오게 한 다음 증세를 살펴보더니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도록 시켰다. 그런 다음 내 입과 코를 자신의 손으로 완전히 틀어막고는, 기절할 만큼 아주 느리게-나에게는 영원한 시간인 것처럼 느껴지게-열다섯까지 세었다. 그리고는 숨을 내쉬게 했다. 이 과정을 서너 번이나 반복한 다음 그가 며칠 전 나에게 말해준 명상의 말을 한마디씩 불러주면서 나에게 따라하도록 시켰다. “내 호흡은 편안하다, 내 호흡은 편안하다. 내 오른팔은 편안하다. 태양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고는 내 가슴 중앙과 배 부분을 강하게 마사지했다. 그리고 다시 느린 호흡법을 실시했다. 호흡법에 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그는 나에게 스스로 그 느린 호흡법으로 숨쉬기를 반복하라고 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단순히 호흡법만을 실행했을 뿐인데, 어느덧 숨쉬기가 훨씬 더 편해졌음을 느낀 것이다. 적어도 당장 죽을 정도로 숨이 넘어가는 증상은 분명히 사라졌다. 그는 가지고 온 조그만 약병을 열고, 컵에 약간의 물을 담은 다음 거기 약을 몇 방울 따르고는 나에게 마시게 했다. “입안에 30초 동안 머금고 있다가 삼켜야 해” 하면서. 그렇게 두 번의 약을 먹었다. 지금도 나는 그 약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동종 용법 치료제 종류가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그때 내가 무슨 원인으로 그런 증상을 겪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하는 채로 있다. 

◇유르테에 기대앉은 한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없고 대개는 홀로 앉아서 나뭇조각 파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흔히들 짐작하는 대로, 단순한 고산병 증세였을지도 모르지만 한스는 병명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단도 내려주지 않았다. 어쨌든 나로서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증상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머물던 향나무 계곡은 해발 3000m 정도라고 들었지만, 나는 그것이 고산병이었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 일행 중에는 잇몸에 심한 염증이 나는 바람에 치과의사도 아닌 한스가 간단한 도구로 수술을 해서 치유한 지그리트도 있고 파울을 포함한 몇 명은 초반에 음식 때문에 위장에 탈이 나기도 했지만, 아무도 나와 같은 호흡곤란 증상을 겪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병은 우리가 향나무 계곡에 도착한 지 한참이나 지나서 발생했던 것이다. 나는 그냥, 다른 무엇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알타이 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매우 기운이 없긴 했지만 더 이상 호흡에 문제는 겪지 않았다. 화장실까지 올라가는데도 현기증이 좀 났을 뿐이고 전날처럼 심각하게 숨이 차지도 않았다. 나는 내가 음식을 더 충분히 먹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날 저녁 메뉴는 양고기를 얹은 밥이었는데, 나는 주방의 여자들에게 맨밥을 달라고 해서 그 위에 소금만을 뿌려서 먹었다. 적어도 그런 방식으로는 삼키거나 소화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당연히 특별한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억지로 많이 먹었다. 남은 밥을 다음날 아침에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친절한 여자들은 나를 위해서 맨밥을 챙겨놓았다가 주곤 했다. 그렇게 하여 나는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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