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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으로 잡은 늑대 가죽. 양을 기르며 사는 유목민에게 양을 잡아먹는 늑대는 천적과도 같다. 갈잔의 말에 따르면 늑대는 결코 “먹을 만큼”만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죽일 수 있는 만큼” 최대로 많은 양들을 죽인다고 한다. |
여행의 마지막이 가까워져 올수록 우리는 점점 더 음식에 대한 얘기를 자주 입에 올리게 되었다. 유르테의 양지바른 벽에 기대앉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먹고 싶은 음식을 화제로 삼는 것이다. 피자와 콜라, 초콜릿 등이 자주 등장하는 메뉴였다. 게르하르트는 나에게 와서 베를린의 값싸고 맛좋은 스시 식당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싶어했고, 자신이 사업상 알게 된 한국인 부부로부터 밥과 김치를 대접받은 이야기까지 털어놓았다. 옌스는 벌써 베를린 테겔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카페테리아로 달려가 진짜 커피 한잔과 독일식 케이크를 시켜 먹겠다는 결심을 이야기했다. 이 모든 현상들을 마리아는 끔찍하게 여겼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런 화제를 입에 올릴 때마다 마리아는 마치 사랑하는 알타이가 모욕당하는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초콜릿이나 콜라가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날이 기운이 빠져감을 느끼고 있었다. 알타이로 가기 전까지 나는 7년 이상을 채식주의자로 살았다. 그래서 알타이 여행을 결심할 때 나에게 가장 큰 장애로 다가온 것은 음식문제였다. 그곳에서는 유목민 식으로 양고기 위주로 식사를 해야 하고 다른 대안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여행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국식 먹을거리는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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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민 노파를 진찰하는 한스. 일행 중 유일한 의사인 그는 알타이에서 많은 환자를 진료했다. |
향나무 계곡의 화장실은 강에서 백여미터 떨어진 약간 높은 산비탈에 있었으므로 나지막하게 경사진 오르막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카자흐의 초대에서 돌아온 다음, 나는 화장실까지 가는 오르막을 걸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너무나 숨이 가빴기 때문에 최소한 세 번은 도중에 주저앉아서 한참을 쉬었다 다시 무거운 걸음을 옮겨야 했다. 내려오는 길에는 현기증이 났으므로 축축한 풀에 발이 미끄러졌고, 고개를 돌려 사방을 쳐다보는 것도 힘에 겨웠다. 그날이 가기도 전에 나는 내가 분명 병에 걸렸는데, 한국에서 가져온 여러 종류의 비상약 중 어느 것을 먹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는, 생전 처음으로 겪는 이상한 증상을 동반하는 병에 걸렸음을 깨달았다. 열이 났고 갈증이 심했으므로 나는 차가운 강물을 물통에 담아 벌컥벌컥 마셨다. 체한 증상으로 속이 메슥거렸으며 바체체가 에-센 하고 외치는 소리만 들어도 비위가 상하고 위장이 뒤집힐 듯이 울렁거렸다. 마리아가 “저녁밥 먹으러 갈 시간이야” 하고 말했는데, 또다시 그 말에 들어간 ‘에센’이라는 단어 때문에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토할 것 같았다. 소화제를 먹었으나 증세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이날 처음으로 저녁식사에 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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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가져온 완두콩으로 수프를 만드는 게르하르트. 위장이란 매우 보수적인 인체기관으로, 여행의 막바지가 되자 우리 모두는 가장 먼저 음식에 대한 향수병에 걸렸다. |
그러나 마리아는 거의 30분이나 지나서 한스를 데리고 왔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유르테 안으로 허우적거리듯 어렵게 들어선 한스는 어둠 속에서 팔을 더듬거리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는 입 속으로 웅얼거렸다. “환자는 어디 있는 거지…” 한스가 나뭇조각 파기 삼매경에 빠져 있어서, 곁에서 여러 번이나 부탁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렸노라고 마리아가 미안해 했다. 한스는 나를 슬리핑백에서 나오게 한 다음 증세를 살펴보더니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도록 시켰다. 그런 다음 내 입과 코를 자신의 손으로 완전히 틀어막고는, 기절할 만큼 아주 느리게-나에게는 영원한 시간인 것처럼 느껴지게-열다섯까지 세었다. 그리고는 숨을 내쉬게 했다. 이 과정을 서너 번이나 반복한 다음 그가 며칠 전 나에게 말해준 명상의 말을 한마디씩 불러주면서 나에게 따라하도록 시켰다. “내 호흡은 편안하다, 내 호흡은 편안하다. 내 오른팔은 편안하다. 태양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고는 내 가슴 중앙과 배 부분을 강하게 마사지했다. 그리고 다시 느린 호흡법을 실시했다. 호흡법에 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그는 나에게 스스로 그 느린 호흡법으로 숨쉬기를 반복하라고 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단순히 호흡법만을 실행했을 뿐인데, 어느덧 숨쉬기가 훨씬 더 편해졌음을 느낀 것이다. 적어도 당장 죽을 정도로 숨이 넘어가는 증상은 분명히 사라졌다. 그는 가지고 온 조그만 약병을 열고, 컵에 약간의 물을 담은 다음 거기 약을 몇 방울 따르고는 나에게 마시게 했다. “입안에 30초 동안 머금고 있다가 삼켜야 해” 하면서. 그렇게 두 번의 약을 먹었다. 지금도 나는 그 약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동종 용법 치료제 종류가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그때 내가 무슨 원인으로 그런 증상을 겪었는지, 아직도 알지 못하는 채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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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르테에 기대앉은 한스.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없고 대개는 홀로 앉아서 나뭇조각 파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
다음날 아침, 나는 매우 기운이 없긴 했지만 더 이상 호흡에 문제는 겪지 않았다. 화장실까지 올라가는데도 현기증이 좀 났을 뿐이고 전날처럼 심각하게 숨이 차지도 않았다. 나는 내가 음식을 더 충분히 먹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날 저녁 메뉴는 양고기를 얹은 밥이었는데, 나는 주방의 여자들에게 맨밥을 달라고 해서 그 위에 소금만을 뿌려서 먹었다. 적어도 그런 방식으로는 삼키거나 소화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당연히 특별한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억지로 많이 먹었다. 남은 밥을 다음날 아침에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친절한 여자들은 나를 위해서 맨밥을 챙겨놓았다가 주곤 했다. 그렇게 하여 나는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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