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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다리를 지닌 테이블’(메레 오펜하임, 1939년) |
나는 오펜하임의 예술 작품이 테이블로 사용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흠칫 놀랐다. 실용적이지 못한 재료나 불안정한 형태 등 기능상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결국 이것은 ‘테이블’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에 ‘테이블’로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을 필요는 물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펜하임이라는 저명한 ‘예술가’가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실용성보다는 초현실주의적 표현법이 더욱 강조된 ‘조각 작품’이라는 사실 때문에 난 당연히 ‘사용’과는 거리가 멀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황동에 금박을 입혔다고 하지 않았나. 꽤 비쌀 그 ‘물건’의 가격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선 일상생활에 사용할 만한 강도를 가진 물건은 못 된다는 말이다.
사실 제작자인 예술가가 작품에 ‘취급주의’ 목록을 붙여서 팔지 않는 한 구입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공간에 두고 어떻게 ‘소장’을 하든 그건 남이 참견할 바가 아니다. 실제로 예술 작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작품을 소장한 사람의 양심과 교양에 맡겨져 왔고, 그들이 작품을 이해하려 미술사를 공부하고 작품에 애정을 쏟을 거라는 기대가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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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된 처칠 초상화를 위한 습작 중 하나(그레이엄 V 서덜랜드, 1954년, 런던 국립초상화 박물관). |
그 그림은 훗날 밝혀지길 1955년에서 56년 사이 켄트에 있는 처칠의 저택 정원에서 나뭇가지, 쓰레기더미와 함께 불태워졌다. 이 같은 사실은 1977년 처칠 여사가 세상을 뜬 후 유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영국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한 이 사건으로 예술작품 소유자의 권리 문제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당시 영국의 저작권법에 의하면, 그 작품의 저작권은 작가 사망 후 70년까지 작품 제작을 의뢰한 쪽에서 갖게 되는데, 이 경우 처칠 부부가 아니라 영국 의회가 작품의 주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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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그림에서 코를 가위로 자르는 영화‘The Magic Christian’의 한 장면(1969년). |
미술 작품은 저작권 여부를 떠나 작품의 존재 자체가 의뢰자와 소장자가 아닌 사회 전체의 문화재산이다. 따라서 어떤 이유든 함부로 훼손하거나 폐기해서는 안 된다. 이탈리아의 경우, 현재로부터 50년 이전에 제작된 작품은 국가가 법으로 보호한다. 하지만 현대에 근접한 제작 연도를 가진 작품일수록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결국 예술 작품은 전시나 경매를 통해 유통되는 과정에서 작품을 다루는 딜러나 소장자, 보관기관의 전문성과 관심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영국을 대표하던 코미디 배우 겸 감독 피터 셀러스(1925∼1980)는 한 영화에서 돈으로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물질만능주의적 시스템 자체를 풍자한 바 있다. 비틀스의 링고 스타(아들 역)와 ‘세상에서 가장 부자(富者)인 부자(父子)’로 등장한 그는 “초상화의 코가 마음에 든다”는 단순한 이유로 미술 경매에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구입하고, 그림 구입이 성사되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가위를 꺼내 그림의 코만 오려내 버린다.
물론 오펜하임의 테이블 소장자는 선친 때부터 예술작품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작품에 대한 사랑도 대단하니 이와 같은 예를 들어 그 사람을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예술 작품을 보관하고 다루는 방법이나 분류는 심지어 예술 분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에게도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특히나 근대에서 현대미술로 넘어오며 여러 장르를 오가거나 그 경계에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걸린 작품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고, 그 감상 방법마저도 매뉴얼을 손에 쥐지 않고는 어려워졌다. 그림의 위아래를 뒤집어서 걸어놓거나, 작가가 보내준 사진과 설명을 들여다보며 설치 작품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는 아트 딜러들의 에피소드는 이제 식상한 썰렁 개그가 되었을 정도이다.
앞서 예로 든 오펜하임의 테이블을 난 ‘예술가’가 제작했기 때문에 ‘테이블’이 아닌 ‘예술작품’으로 생각했지만, 그 작품을 소장한 컬렉터는 ‘테이블’이라고 꼬리표를 붙인 작가의 불순한(?) 의도를 존중해 작품과 가구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그 ‘물건’을 놓고 스릴감을 즐긴 것이다.
‘새의 다리를 지닌 테이블’은 작가가 ‘테이블’이라고 정의를 내렸고, 두 발로 서서 엉성하게나마 판을 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조각이 아니라 테이블, 즉 디자인일 수도 있다. 사실적으로 묘사된 새의 다리에 교묘하게 테이블을 얹은 이 형태는 오펜하임의 작품 세계를 모르더라도 이 작품이 초현실적인 ‘물건’이라는 것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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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제 혹은 모피로 덮힌 찻잔'(1936년, 뉴욕 모마 현대미술관). |
잔 속에 담긴 액체가 주는 축축한 느낌과 모피와 입술이 닿는 묘한 감촉을 상상하는 불편한 느낌은 이 작품이 금지된 성적 상상을 연상시키는 완벽한 초현실주의적 작품이라는 찬사를 이끌어 냈다. 이 작품의 제작 당시 오펜하임은 고작 23살이었다. 그녀는 시대의 아이돌 스타였던 셈이다.
실제 삶에서도 ‘어느 남성이든 원할 법한 아름답고 어린 여성’이었던 오펜하임은 그들이 꿈에서조차 바라 마지 않던 ‘뮤즈’ 아이콘을 완벽하게 재현해 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진작가 만 레이(1890∼1976)는 ‘앵그르의 바이올린’같이 그림을 그려 놓은 듯한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감각의 사진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사진의 실제 모델이 되어 주었던 오펜하임을 ‘초현실주의적 뮤즈’로 바라보는 만 레이의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다.
당시 어울리던 초현실주의 작가들보다 훨씬 어렸던 그녀가 다른 동료 작가들과 적극적으로 섞이는 데에는 그녀의 활발하고 개방된 성격도 중요했지만 여성이라는 사실도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 장점은 곧 그녀의 발목을 잡게 된다. 그녀를 ‘뮤즈’로 바라보는 시각과 성숙한 ‘작업 동료’의 역할 사이에서 한동안 그녀는 갈팡질팡하게 된다. 여성을 관찰과 상상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에서 그녀조차 자유로울 수 없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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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그르의 바이올린’(1924년). 이 작품의 모델이 바로 오펜하임이었다. |
다시 처음의 사진으로 돌아가 새의 다리를 한 테이블을 들여다보자. 너무 가늘어 바들바들 떨릴 것같이 서 있는 다리 두 개가 보일 것이다. 치맛자락같이 다리를 덮은 테이블 아래로 보이는 허벅지는 약간의 굴곡이 있긴 하지만 허벅지 사이의 공간이 움푹 패어 보일 만큼 마른 어린 소녀의 다리처럼 보인다. 그녀는 잔뜩 긴장을 한 상태라 무릎이 가운데로 모였고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다. 긴장을 풀지 않고 관중을 노려보며 서 있는 다리와 어린 오펜하임의 이미지가 오버랩되어 보이는가.
이 작품은 1972년 나무 테이블에 24k 금박을 입히는 동일한 기법으로 이탈리아에서 ‘트라챠(Traccia·흔적)’라는 이름의 디자인 제품으로 생산되기 시작했고, 현재도 고급 디자인 가게에서 판매하고 있다. 그리고 1939년 제작된 원작은 간혹 소더비 같은 유명 미술 경매장에 나온 후 높은 가격의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곤 한다.
이탈리아 밀라노 거주 조각·미술설치가 hojin0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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