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 영향 아닌 유서깊은 우리말 20세기 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우리말은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가장 현저한 것은 일인들이 만들어 쓴 일제 한자어가 대량 유입됐다는 점이다. 일제 한자어는 한자라는 공통성 때문에 우리 쪽 한자어와 쉽게 구별되지 않아 우리 것이려니 하고 무 자각적으로 쓴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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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교수 |
해방 이후 국어순화란 이름으로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야채’ 대신 ‘채소’, ‘일석이조’ 대신 ‘일거양득’을 쓰자는 운동은 그러나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사회 변화를 반영하는 말의 흐름을 인위적 노력으로 막는 것은 무리이고 성과도 없다. ‘혼인’이 ‘결혼’에, ‘노자’가 ‘여비’에, ‘역사(役事)’가 ‘공사’에 밀리는 추세를 막을 수도 없고 막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유서 깊은 우리말을 알고 쓰자는 노력은 귀한 것이고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민족어를 지키자는 선의의 취지가 때로는 오해를 확산하고 재생산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일어의 영향을 파기하자는 열의가 도에 넘쳐 유서 깊은 우리 어법을 부정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나의 살던 고향’ 같은 노랫말이 일본어 어법의 흉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일본어를 조금 알고 우리말을 깊이 모르는 데서 오는 오해다. 많이 읽힌 계몽적 글쓰기 책에 적혀 있어 자꾸만 재생산되는 것 같다. 일본과 연결된 것이어서 민족감정에 호소하는 논리가 설득력을 제공하는 면도 있는 것 같다.
현대국어에서와는 달리 중세(15세기) 국어에서는 주격조사 ‘-이’보다 관형격 조사 ‘-의’가 더 일반적으로 쓰였다. 즉 ‘나의 살던 고향’은 어엿한 우리말 어법이요, 일본어 어법의 추종이 아니다.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금보다도 더 많이 쓰였다. 가람 이병기의 시조에 ‘돌아가신 날’이란 것이 있다. 거기 ‘가시든 그날 밤은 해마다 돌아온다/닭의 우는 소리 더욱이 서글프고’란 대목이 보인다. 해방 전의 시가에서 이런 어법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산문의 경우에도 해방 전에는 관형격 조사를 쓴 경우가 허다하다. 가령 우리말 어휘가 가장 풍부하다는 정평을 얻고 있던 벽초 홍명희의 글에 ‘나의 존경하는 작가 톨스토이’란 것이 있다. 장편 ‘임거정’을 보더라도 그런 사례는 많다. ‘애기의 갖다 준 밥’, ‘목사의 타이르는 말’, ‘늙은 여편네의 대답하는 말’, ‘호랑이의 달아난 기척’ 투의 문장이 수두룩하다. 가람이나 벽초나 우리말 구사의 대가요, 또 일어 어법을 추종할 인사들이 아님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중세 이후 관형격 조사는 면면이 이어져 온 우리의 정통적 어법이다.
육당 최남선이 독립선언문에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이라고 적었을 때 그는 우리말의 통상적 어법을 따른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어의 구문(構文)투가 우리 문장에 많이 들어왔다. 거기 익숙해진 젊은이들에겐 관형격 조사가 들어 있는 대목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엣 말투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일본에 비슷한 어법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저들의 경우엔 애초 종속절에 한해서 그러한 어법을 쓰다가 나중에는 주절에도 쓰게 되었다. 20세기 이전 우리가 영향을 주면 주었지 우리가 저들의 문화를 수용하거나 추종한 것은 없다. 옛 어법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살던 고향’이 유서 깊은 우리 어법이란 것을 알아 두자는 것이다. 오해의 재생산에 종지부를 찍어야 마땅하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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