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습이란 사고를 예방해 주기도 하지만 사람을 소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무릇, 현대인이 경험하는 학습의 내용도 그렇다. 수많은 저널, 영상, 칼럼들은 마음껏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계산하고 절제하라고 말한다. 그러니 이 삶은 더더욱 팍팍할밖에.
서른 한 살의 저널리스트 리즈 역시 전형적인 뉴요커이다. 꽤 성공한 저널리스트인 데다 귀여운 남편, 맨해튼의 자택까지 마련한 그녀는 겉보기에 제법 괜찮은 삶을 살아가는 듯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외적 수식어들이 허전하게만 느껴지기 시작한다. 단속하고 절제하고 경쟁하며 살아왔던 삶이 너무 숨가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가장 먼저, 자아라고 부르는 요령부득의 존재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넌 누구니, 넌 왜 사니와 같은 먹고사는 데 하등 상관없지만 인간학적으로는 너무 중요한 질문들이 내 안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냥 그런대로 이 질문들을 묻어두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 질문에 해답을 얻기 위해 현재를 박차고 떠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번째 대답을 따른다. 훌쩍 떠나 버리기에는 코앞에 닥친 카드대금이나 주택 융자가 날 가만히 두지 않는다. 남편도, 아내도, 혹은 아이들도 발목을 붙잡긴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리즈는 떠난다. 그것도 훌쩍. 아예 구속이 되었던 삶 전부를 버리기 위해 이혼까지 한다. 혈혈단신이 되어 그녀는 말 그대로 ‘자기’를 찾기 위해 이탈리아, 인도, 발리를 여행한다. 게다가 일 년씩이나 말이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는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속풀이 판타지에 가깝다. 어떤 직장인인들, 주부인들, 가장인들 그렇게 훌훌 벗어던지고 떠나고 싶지 않을까. 하지만 여행 경비도 문제고, 혼자 떠나는 것도 두렵다. 이런 두려움 사이로 영화는 형형색색의 여행 이미지를 바탕으로 부러운 판타지를 설파한다. 로마에서 마음껏 키스를 나누고, 나폴리에 가선 칼로리 걱정 없이 피자를 먹어치운다. 인도의 아쉬람에서 내 안의 신을 발견하고, 발리에선 방광염이 걸릴 만큼 열정적 사랑을 나눈다.
영화는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에세이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인만큼 영화의 이야기 진행은 단조롭다 못해 지루하다. 하지만 만약 이 영화를 선택한다면 흥미로운 이야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차마 내 돈 주고 직접 보지 못하는 로마의 풍광, 두려워 엄두가 안 나는 인도의 수련과정을 간접 체험함으로써 사람들은 영화표만치의 위안을 얻는다.
중요한 것은 위안의 수준도 그 정도에 그친다는 것이다. 영화는 여러 점에서 여행과 일탈을 충동질하지만 적절한 해답을 주지는 못한다. 연애 영화를 보면 연애를 하고 싶어지지만 실제로 잘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자아찾기는 영화로 해결되지 않는 난제이다.
오히려 진짜 해답은 이런 것이 아닐까? 자기를 찾기 위해 너무 멀리 갈 필요가 없다는 것 말이다. 성인은 매일 나무아미타불만 외우고 불러도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아를 찾기 위해 굳이 로마, 인도, 발리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마일리지를 쌓을 필요는 없다. 리즈가 두 번째 머문 아쉬람에서 발견했듯이, 신은 내 안에 있다. 그렇다면, 바로 이곳에서도 신은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신은 말 그대로 바로 “여기” 있다.
영화·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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