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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맥아더 동상과 서울의 동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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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9-27 18:01:57 수정 : 2010-09-27 18: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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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 9월 15일, 한국전쟁의 중요한 분수령이 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돌이켜 생각해 본다. 이 작전으로 9월 28일, 북에 빼앗긴 서울을 석 달 만에 수복해 전세가 크게 역전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인천시민들은 1957년 인천의 자유공원(전 만국공원)에 약 5m 높이의 맥아더 장군 동상을 세웠다.

서울의 파고다 공원보다도 먼저 조성된 이 자유공원이 있는 산 언덕은 ‘차이나타운’과 화교학교, 19세기 말 청나라와 일본의 ‘조계지(租界地)’는 물론 일본의 은행, 서양 공관의 터 등 개화기의 역사와 문화 유적으로 가득한 곳이다. 

신용철 경희대 명예교수(사학)
그런데 2005년 이래 이 맥아더 동상의 철거문제가 커다란 논란과 충돌을 가져왔다. ‘다 이긴 전쟁을 망친 장본인이며 제국주의의 상징인 맥아더의 동상을 타도(철거)하자’는 주장과 운동이 우리민족 연방제통일회의 등의 주도로 ‘미군 강점 60년을 넘기지 말라’며 격렬하게 일어났었다.

2005년 9월 동상 철거를 외치는 4000여명의 폭력시위대가 이를 제지하는 경찰과 충돌을 빚기도 했다. 그 후 해병대전우회 및 시민단체 인사들이 동상 주변에서 자발적으로 경비를 서기도 하여 남남(南南)대립의 문제점을 노출시켰는데, 최근에도 인천상륙작전의 기념식을 둘러싸고 갈등이 불거진 바 있다.

우리 땅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여한 외국 군인의 동상이 많이 세워지는 것이 물론 자랑스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천 년간 국가의 운명과 연관된 수많은 전쟁으로 우리가 겪어야 했던 역사 속의 흔적이니 부정한다고 역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례는 강대국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역사로서뿐 아니라 후세를 위한 교훈으로서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 이웃인 중국 도처에서도 일본 및 외국 침략의 흔적을 볼 수 있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분단되었던 독일의 베를린이나 포츠담 등에서도 전승국들의 자취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특히 옛 동독지역의 에어푸르트시에는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와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가 1813년 독일에서 세력분할을 놓고 싸울 때 묵은 호텔이 멀지 않은 거리에 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16세기의 임진왜란과 20세기의 한국전쟁에 외세로서 모두 참전해 한반도 역사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중국은, 임진왜란을 ‘왜에 대항해 조선을 도와 준 전쟁(抗倭援朝戰爭)’, 한국 전쟁을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도와 준 전쟁(抗美援朝戰爭)’으로 역사에 쓰고 있다.

중국의 적대국이 ‘왜(倭)’에서 ‘미국(美)’으로 한 글자만 바뀌었다. 북한 신의주의 건너편 단둥(丹東·옛 안동)의 언덕에는 53m나 되는 높은 ‘항미 원조전쟁기념탑’과 웅장한 ‘기념관’이 세워졌고, 평안북도에는 한국전쟁 중 전사한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毛岸英)의 묘지가 잘 관리되고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1601년, 지금의 서울 숭인동에 중국 군신인 관우(關羽)의 사당 동묘(東廟)가 세워졌는데 현재 보물로서 보호 관리되고 있다. 이는 60년 전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의 동상과 하나의 좋은 대조를 이룬다.

서울의 관우 사당 동묘는 아무런 시비가 되지 않는데, 인천의 맥아더 동상 철거는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다.

아마도 418년 전 전쟁의 상처는 너무 오래된 역사여서 잊어버리고, 오직 아직도 많은 사람이 체험한 60년 전의 전쟁만 부정 말살하고 싶은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남과 북,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란 구도 속에서 21세기 초 대한민국의 현대사 인식을 둘러싼 혼란과 모순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서 매우 안타깝다.

신용철 경희대 명예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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